멜랑콜리적 삶과 시의 위안_1

윤동주 시인의 작품을 중심으로

by Sophia
나는 10초에 한 번씩 죽음을 생각한다


‘힘들어 죽겠다’처럼 나오는 한숨이 아니라 정말로 죽음을 기도한다.


머리가 유리병처럼 산산조각으로 깨지는 상상을 하고, 머리를 박고, 손목을 그었다. 연속적인 자살사고로 수업시간에 울다 뛰쳐나간 적이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이다. 10년째 심리 상담을 받고 있고 9년째 정신건강의학과에서 치료를 받고 있다. 너무 고통스럽다. 차라리 죽으면 모든 고통이 끝날 텐데 죽지 못하는 겁쟁이라는 생각을 할 때도 있다.


이 한계상황에 마주할 때마다 나는 철학을 했다. 철학은 어떤 의사와 상담사보다도 나를 잘 이해했고, 마음속 깊은 상처를 위로했다. 철학과 마찬가지로 나를 위로해 주는 것은 시와 그림이다. 스스로 깨닫지 못하는 감정을 표현해 주었고, 다른 사람에게 미처 말하지 못한 감정을 공유하며 치유받았다. 이 에세이에서는 윤동주 시인의 작품을 소개하며 시가 주는 위안을 설명하고자 한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우울한 감정을 느끼고 살아간다.

그러나 가라앉은 기분이 나아지지 않고 더욱더 침전한다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 우울에 잠식되어 인간다운 삶을 영위할 수 없을 것이다. 우울을 철학에서는 멜랑콜리라는 용어로 설명한다.

프로이트에 의하면, 멜랑콜리는 매우 고통스러운 불쾌감, 바깥세상에 대한 관심의 부재,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의 상실, 자신을 비난하기, 그리고 광적으로 벌을 받기 원하는 자존감의 상실로 나타난다.


그중 가장 중요한 특징으로 자존감의 저하를 꼽는다. 자책과 자기 비난을 쏟아내다가 벌을 받고 있다는 망상적인 생각으로까지 치닫는 것이다. 자신이 벌을 받을 것이다, 또는 벌을 받고 있는 것이라는 것은 우울증 척도 검사에서도 항상 등장하는 항목이다. 나 또한 과거의 사소한 실수마저도 잘못했기 때문에 벌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애도와 달리 멜랑콜리는 슬픔의 근원을 알기 어렵다. 사랑하는 대상이 실제로 죽는 것이 아니며, 상실될 뿐이다. 또 상실된 대상이 꼭 죽은 사람이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무엇을 상실했는지도 알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나는 내가 왜 우울한지 모를 때가 많다. 그저 호르몬 때문이라고 치부하곤 한다. 원인을 알면 그것을 해결하려는 시도를 하겠는데, 그러지 못해 몹시 답답하다. 이럴 땐 윤동주 시인의 「바람이 불어」가 떠오른다.


바람이 어디로부터 불어와

어디로 불려 가는 것일까

바람이 부는데

내 괴로움에는 이유가 없다


나에게 우울함은 원인이 없었고 언제 끝날지도 모르는 대상이었다. 매서운 바람이 부는데 내 괴로움에는 이유가 없다. 그래서 더 고통스러웠다. 아무것도 알지 못하고, 찾으려는 에너지조차 없는 상태에서 무기력하게 누워있기만 했다. 이 시를 알게 되었을 때 나의 경험을 대입하여 읽었고, 시가 나의 상황을 이해하고 위로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때로 사람들에게 우울을 이해받지 못할 때도 있다. 심지어 의사마저 아무런 말이나 던지곤 했다. 이해받지 못함에서 상처를 받았을 때, 「병원」을 떠올렸다. 다음은 시의 일부분이다.


나도 모를 아픔을 오래 참다 처음으로 이곳에 찾아왔다.

그러나 나의 늙은 의사는 젊은이의 병을 모른다. 나한테는 병이 없다고 한다.

이 지나친 시련, 이 지나친 피로, 나는 성내서는 안 된다.


일제강점기라는 시대상황을 제외하고 이 시를 감상하였을 때, 더 구체적으로는 멜랑콜리를 염두에 두고 감상하면 사람들에게 이해받지 못하는 멜랑콜리커를 떠올릴 수 있다. 자신도 모르는 아픔을 참고 참다 병원에 찾아간다. 하지만 일반 사람들은 그것이 병이 아니라고 한다. 그저 잠시 슬프거나, 게으른 것이라 한다. 이것이 내게는 큰 시련이며 피로이지만, 성내지 않고 나를 이해하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 이는 곧 나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이해하는 것으로 나아간다.



[멜랑콜리적 삶과 시의 위안_2]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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