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는 내담자
아침에 일어나서 정신을 차리기 위해 커피 한 잔, 오후의 나름 함을 이기기 위해 커피 한 잔, 저녁에 씻기고 먹이고 재우느라 진 빠져서 커피 한 잔 마신다. 더위서 아이스아메리카도 한 잔, 피곤해서 캐러멜마키아또 한 잔, 심심해서 믹스 커피 한 잔 한다. 어떤 엄마는 커피가 육아 동지 중 하나라고도했다.
놀이치료실 옆에는 대기실이 있다. 아이를 데려온 양육자가 놀이치료실로 들어간 아이를 기다리는 곳이다. 센터마다 조금씩 다르지만 대부분 아이를 기다리면서 차를 마실 수 있는 공간이다. 테이블과 의자가 있고, 각종차 믹스커피등이 놓여있다. 물은 정수기나 커피포트를 비치한다.
어느 날 그 공간이 너무도 특별하게 다가온 사건이 있었다. 언어 발달이 느린 자녀에 대한 고민을 가지고 방문하셨다. 그 친구는 아기 때부터 말이 늦었다. 크면서 말은 곧잘 하게 되었는데 발음이 많이 부정확했다. 유치원에서 친구들이 못 알아듣고 되묻는 상황이 자주 보여서 혹시 위축되지는 앉는지, 화가 나지는 않는지 걱정이 된다고 하셨다. 아이와 엄마가 함께 방문했다. 센터에 들어오자마다 아이가 대기실 끝 커피가 있는 곳으로 자연스럽게 걸어갔다.
엄마 맥띰(맥심)? 브액(블랙)?
블랙으로 연하게 타줘
익숙을 넘어 능숙하게 카누 커피 봉지를 뜯는다. 자세히 보니 커피를 다 넣지 않고 반 만 넣었다. 커피포트였지만 조심조심 능숙하게 물을 부었다. 놀란 것은 커피를 탄 종이컵이 두 개 겹쳐있었다. 연하게 탄 블랙커피를 엄마에게 잘 전달하고 놀이치료실로 들어왔다.
엄마와 아이는 매우 자연스러웠지만 난 아주 놀라웠다. 놀람 포인트는 여러 가지였다. 커피 타는 것이 아주 익숙한 점, 연하게 타 달라는 엄마의 요청에 커피를 반 만 넣은 점, 커피포트 사용이 아주 능숙한 점, 종이컵을 두 개 겹쳐서 뜨거워도 잘 옮긴 점, 엄마가 전혀 도와주지 않고 앉아 계신 점, 무엇보다 둘 다 너무 당연한 일상이었던 점이었다. 19년째 놀이치료를 하는데 대기실에서 이런 장면은 흔하지 않다. 그동안 내가 봤던 흔한 장면은 "만지지 마, 엄마가 해줄게 앉아서 기다려"였다. 초등학생들 친구들이 엄마에게 커피를 타 드리려는 모습은 있었지만 이렇게 자연스럽지는 않았다.
커피 타는 모습이 아주 자연스럽네요.
들어오면서 주전자에 물이 적은 거
확인했어요.
물이 그 정도 있으면 혼자 충분히 해요.
한 두 번 해 본 솜씨가 아닌데요
어릴 때부터 말이 늦어 언어치료센터를 많이 다녔고, 커서는 발음 교정을 위해 센터를 많이 다녔다고 했다. 갈 때마다 대기실에서 조금씩 알려주고 연습하니 이젠 잘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정수기를 사용하는 곳, 커피포트를 사용하는 곳, 커피 기계를 사용한 곳, 진한 커피, 연한 커피, 녹차 등 상황마다 장소마다 융통성 있게 잘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다른 일상도 거의 독립적이었다. 유치원생이 거의 스스로 하는 삶을 살고 있었다. 먹기, 입기, 씻기 자기는 물론 부모님께 커피 타드리기, 토스트기 사용 등 자립이 잘 된 아이였다. 발음 때문에 친구들이 못 알아들으면 속상하지만 다시 잘 말해주면 된다고 또박또박 말하였다. 엄마의 육아 방식에 칭찬이 저절로 나왔다.
아이는 일상에서 유능감, 성취감, 책임감, 자존감 등이 잘 형성되고 있네요.
친구들에게 발음을 배우고 있다고 당당하게 밝히고 있는 것으로 보아
위축되거나 화가 나있지 않아요. 걱정 안해도 될 듯해요.
잘 크고 있습니다. 이리 잘 키우시느라 애쓰셨어요.
나의 이런 말에 엄마는 눈물을 뚝뚝 흘리셨다. 사실 발음 빼고 못하는 것이 없는 아이라고 하셨다. 그리 이내 이런 고백을 하셨다.
사실은 제가 위축되어 있는 것 같아요.
사실은 제가 화가 나있어요.
사실은 친구 엄마들에게 제가 신경 쓰고 있어요.
엄마의 고백을 들으며 아이가 아닌 엄마가 상담을 받아야 하는 상황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엄마 역시 알고 있지만 아이를 핑계 삼아 센터를 방문한 것이었다. 엄마가 놀이치료실에 있고 아이가 대기실에서 기다려야 하는 상황이다. 놀이치료가 필요한 엄마들에게 말합니다.
엄마도 놀이치료 합니다.
힘들면 오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