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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꿈꾸는 노마드 Apr 29. 2023

너무도 유명한(했던?) 그 책

무라카미 하루키 '상실의 시대'(원제 노르웨이 숲)

무라카미 하루키는 우리 현대 문학에서 거쳐야 할 검증의 산실이다라고까지 말해질 정도로 독특한 문체와 글 쓰기 스타일로 주목받고, 인정받고, 거기다 큰 인기까지 누리는 작가이다. 

그의 작품에 영향을 받은 많은 우리나라 작가들이 있음도 사실이고, 그에 대한 얘기는 하도 들어 귀가 따가울 정도고 말이다.  

나 역시 이 책을 읽으며 그의 스타일에 풍덩 빠져 버렸고, 그의 얘기들이 내 안으로 아주 자연스럽게 스며들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의 글은 실 풀리듯 술술 풀려 나가 읽는 사람이 마치 주인공이 된 듯한 착각을 일으킬 만큼 그 내용에 동화되게 만든다.  그 결과 나 또한 이 책을 읽으며 처음부터 끝까지 나와 주인공을 분리할 수가 없었다.  


사실 이 책을 읽은 건 처음이 아니었는데, 오래전 돼먹지 않은 애국심으로 일본작가의 글을 읽는다는 게 좀 껄끄러웠기도 했고 또 자세히 내용 안으로 나 자신을 몰입하지도 않고 뭐 그렇고 그런 사랑얘기지, 하면서 건방을 떨었던 기억이 있다.  

그런 이유로 당시엔 당연히 끝까지 읽지 못했고, 그저 앞부분만 뒤적이다만 경험이 있다.  

그런데 역시 세월이 흐르며, 또 철이 들어가며 세상의 온갖 것 안에서 나만의 깨달음이나 배움을 찾아가게 되면서 예전의 치기 어린 사고방식이 점차 순화됐나고나 할까? 

그 덕분에 이번엔 이 책을 펼쳐 든 순간부터 그 안에 날 처박을 수밖에 없었음을 고백하게 된다. 


난 다들 말하는 이 책의 사랑얘기에 관심을 갖고 싶진 않다.  이런 사랑 얘기도 있겠구나 정도이고, 젊은 시절 작가의 모습이라고도 하니 그에게 이런 아픈 시절이 있었구나 정도일 뿐이다.

나는 이 책에서 나만의 어떤 주제를 포착했는데, 그건 바로 <왜 다들 그렇게 가엾은 영혼인가>라는 거였다.


이 책에 나오는 주요 등장인물 어느 누구도 온전한 자신의 의지만으로 삶의 여정을 가고 있지 못하다는 그 부분이 내겐 가장 가슴에 와닿았다. 

나오코의 모습이 그렇고, 그런 그녀를 안쓰럽게 바라보는 와타나베가 그렇고, 그를 사랑하는 미도리가 그렇고, 또 걔 중에 나이 먹은 레이코가 역시 그렇고 말이다. 

더불어 우리는 역시 나약하고 한계적 인간일 수밖에 없음이야를 또 한 번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동시에 이 책에 나오는 '성'의 이야기들은 관능적으로 들리기보다는 아픈 인간들끼리의 소통으로 보여 많이 아련한 슬픔을 던져준다.  

왜 사랑한다면서 그들은 참아야 하고, 사랑하지 않은 사람과의 잠자리가 더 자연스럽고 동시에 편한 것일까? 왜 여기서 보여주는 '성'은 기쁨이 아니고 비련이어야 하는가라는 질문이 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그나마 주인공 선배인 나가사와는 세상과 관계없는 '의지의 인간'으로 보이지만, 결론은 그 역시 그다지 행복스러워 보이진 않고 그에게서도 역시 불행한 인간의 어떤 모습을 볼 수 있다.  그의 애인 하쓰미 역시 그렇고 말이다.  

이런 면에서 어찌 보면 우리 인간은 공평하게 무너지는 것이 아닐까? 란 생각이 들기도 했다. 


이 책은 대부분 사랑이야기라고들 하지만 내겐 그저 인간의 이야기, 그중에서도 처절하고 슬픈 젊은 청춘들의 이야기로 보였다. 또 늘 내가 의문을 갖고 천착하는 상처 없는 영혼은 없다는 Sujet, 그러기에 우리 모두가 나오코가 지냈던 '정신요양소'를 우리들이 꿈꾸는 '이상향'으로 봐도 가히 틀린 건 아닐 것 같단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그곳은 환자와 의사의 구별 없이 모두 자기가 잘할 수 있는 것을 가르치고 서로 도와주며 지내는 곳이고, 바로 그런 곳에서의 생활이야말로 말 그대로의 '유토피아'가 아닐까 싶었다.  


또한 책의 내용과 원제인 노르웨이 숲의 연관성이 없다고들 말하지만, 난 이것도 역시 우리가 찾고 싶은 우리들의 '낙원'이 바로 이 '숲'이 아닐까 싶었고, 우연히 그 제목의 비틀스 노래를 사랑하는 하루키가 그 제목을 그대로 쓸 수도 있지 않았을까는 생각이 들었다.  

이건 순전히 나만의 확대해석일 수도 있겠지만, 난 어쨌든 여기서 말하려고 하는 것은 젊은 날의 초상보다는 젊은 날의 당연한 고뇌라고 단정 지었다. 또한 우리 모두의 방황하는 모습이라고 보았다.


또 하나 내가 이 책을 통해 확실히 깨닫게 된 것이 있는데, 여기 나오는 말 그대로 인간의 부류 중엔 지극히
자신에게만 흥미를 느끼는 그런 사람이 있다는 것. 그들은 자신이 무엇을 생각하고, 자신이 무엇을 느끼고,

자신이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에만 관심을 가지고 있고 늘 그런 갈증 속에 자신을 던져야만 되는 그런 타입의 사람이다.  나 또한 그런 사람이 아닐까 란 질문을 이 책 읽는 내내 머릿속에 달고 다녀야 했다. 


그리고 또 하나, 죽음으로 눈앞에선 사라졌더라도 가슴에 묻고 있으면 나의 모든 사고와 행위에서 그 인물의 흔적이 보이고 내가 죽을 때까지 떨쳐낼 수가 없는 것이라는 것. 그건 아마도 죽음 저 넘어서까지 지니고 가야 할 것일 테고, 나의 삶 내내 그의 영혼은 함께 숨 쉬고, 영향 미치고, 함께 한다는 것.


나는 오래전 세상을 떠난 이모(피붙이는 아니고 우리 어머니부터 나와 내 동생, 내 아이들까지 돌봐준 분)를 그리워하고 있고, 늘 가슴속에 고이 간직하며 그녀의 숨결을 느끼고 있다고 믿으며 지내고 있다.  

자잘한 일상에서도 그녀를 느끼고 기억하는데 주로는 많은 아쉬움과 통한을 자주 경험한다. 아마도 내가 살아 있는 동안은 봄날의 따뜻한 햇살 속에서도, 한 여름 차오르는 아지랑이 속에서도, 가을날 허허하게 뒹구는 낙엽들에서도,  온통 하얀 세상으로 뒤 덮인 겨울 안에서도 난 그녀를 느낄 것 같다. 

그래서 감사한다.  


우리가 잃어가고 있는 것들.  바로 우리의 자화상을 들여다본 듯한 느낌으로 이 책 '상실의 시대'를 읽고 역시 무라카미 하루키란 이름이 괜히 유명한 건 아니었구나를 또 한 번 찐하게 느꼈다. 

동시에 좋은 글을 쓰고 싶은 사람으로서 마음을 비우고 내 안의 것들을 차분히 들여다보면, 또 은밀하게 세상에 귀를 기울여 보면 나 역시 좋은 글을 쓸 수 있겠지 라는 희망 어린 결론과 함께 누구에게 인지 모를 감사를 표하며 조용히 책장을 덮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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