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과업 1-4 위기

by 꿈꾸는 노마드

기남이 유영산을 들락거리며 박흥식을 만난 지도 어언 몇 달이 지났다.

기남의 설득으로 박흥식은 곧 그곳을 떠나 서울, 영동에 정착할 거 같았지만 사정이 생긴 탓에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먼저 그의 어머니와 여동생이 유영산 천막촌을 떠나길 원치 않았다.

이미 머무는 곳도 천막촌인데 어차피 다른 천막촌으로 갈 바엔 옮길 필요성을 못 느끼겠다는 게 첫 번째 이유였다.

그리고 박흥식의 여동생인 박순애는 지금 일하는 곳이 편하고 정도 들어 떠나고 싶지 않다고 했다.

박흥식의 어머니 역시 살던 곳이 편하고 가끔 일거리가 들어오는데 그건 그동안 살던 터전이라 그런 거지 다른 곳으로 옮기면 그나마 일거리를 찾기 힘들 걸 걱정해 반대했다.

그러다 보니 시간만 무심히 흘러 어느덧 겨울이 되었다.


“기남아! 겨울엔 이사하기 어차피 어려우니까 봄까지 기다리면서 어머니와 동생을 더 설득해 볼게.”


박흥식이 기남을 만났을 때 어렵게 운을 뗐고, 기남은 조바심이 났지만 박흥식의 말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또 몇 달이 지나갔다.

드디어 봄이 왔고, 유영산에도 꽃이 피기 시작했다.

그동안 기남은 박흥식 가족이 영동으로 이사 오게 되면 살 곳과 순애가 할 일을 찾는데 힘을 쏟았다.

수업 후 압구정동에 도착한 기남은 이제 막 지어진 현대식 한 아파트를 보면서 당시 1000만 원도 되지 않던 아파트 가격이 자신의 사형이 집행됐던 1997년엔 IMF로 상당히 떨어졌지만 그럼에도 2억이 넘어갔던 걸 기억해 냈다.

물론 그건 그 아파트에서 가장 작은 평수인 30평형 가격을 말함이었다.

당시 처음으로 고층인 15층 대형 단지로 지어진 그곳은 그 외 40, 48, 60평형이 있었다.

30평에 비해 더 큰 평수 시세 차는 훨씬 더 컸던 걸 기억하며 기남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곳을 지나 도곡동 매봉산 자락 판자촌에 도착한 기남은 최소의 비용으로 박흥식 가족이 머물 판잣집이라도 구할 수 있을지 알아보기 위해 주변을 살폈다.

그러다 지나가는 어르신들이 하는 말을 우연히 듣게 됐다.


“여기 개발 들어가면 딱진가 뭔가 얻는다던데. 그래서 멀쩡히 다른 데 집 있는 사람들도 일부러 이리로 온다잖아?”

“그래? 우리 같은 밑바닥 서민 아닌 사람도 이런 판자촌에 일부러 들어온다는 거야? 참 재밌네, 그려! 허허.”

기남은 그때부터 이미 부동산에 대한 감을 가진 자들이 있었다는 걸 새삼 깨닫게 됐다.

아니 어찌 보면 그 훨씬 이전부터일 수도 있으리라.

1960년 들어 서울이 개발되면서 각처에서 머리 누일 곳을 찾아 몰려든 사람들을 위해 여러 프로젝트가 생겼고, 그 결과 수요공급의 법칙에 따라 부동산 가격이 형성되고 그걸 이용해 돈을 버는 사람들이 있었을 테니까 말이다.

기남은 이곳저곳을 둘러보다 늦게 집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인희가 벌써 가게 문을 닫고 집에 와 있었다.


“오늘 힘들어서 조금 일찍 가게 문 닫았어.”


인희가 요즘 부쩍 힘들어 보여서 걱정하던 기남은 순간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죄송해요, 엄마! 제가 오늘 도와드렸어야 하는 건데. 오늘 기름통 배달되는 날이잖아요.”
“아니 괜찮아! 내가 예전처럼 밀어서 썼어.”

“다음부턴 이런 일 없을 거예요.”

“그나저나 무슨 일로 그렇게 바쁘니? 요 며칠 수업 끝나고 어딜 그렇게 다니는 건데?”

“그게... 제가 아는 형이 있는데 그 형네 가족 서울로 주거지를 옮기려고 하거든요.

그래서 제가 좀 도와주려고요.”

“니가? 니가 뭘 어떻게 도와줘?”

“어 그게 그러니까... 제가 살 집을 좀 알아보러 다니고 있어요.”

“니가 집을 알아본다고?”
“네. 요즘 한창 개발 중인 영동에 있는 적당한 집으로요.”

“나도 영동에 대단지 개발 중이란 소린 지난번 미장원에서 듣긴 했는데 미심쩍던데.

미나리 밭에, 농사짓던 논밭에 건물이 들어선다는 게 도무지 믿기지 않아서.”

“아니요. 혹시 엄마도 투자할 돈 있으시면 거기에 투자하세요.

거기가 앞으로 완전 황금알을 낳는 거위로 변할 테니까요.”

“니가 어떻게 그렇게 잘 알아? 또 엉뚱한 소리 시작한다! 요즘 좀 잠잠하다 했더니.”

“제 말 믿으시라니까요. 제가 고급 정보를 들었는데 그게 확실한 정보통한테서 나온 거거든요.”

“그래? 그럼 나도 투자 좀 해 봐?”


인희가 솔깃한 표정을 짓다 갑자기 심각한 표정으로 바뀌었다.


“그런데 말이야, 기남아!”

“왜요? 무슨 일 있어요?”

“아니 일은 아니고... 그 사람 있잖아. 정육점 하는 동수씨 말이야.

미장원 언니한테 왜 내가 자길 안 만나려고 하냐고 정색을 하면서 묻더래.”

“그래서요?”

“그냥 그 언니가 뭐라고 둘러대긴 했다는데 나보고 한 번 더 만나보라고 난리야.”

“안 돼요! 절대 그 사람 만나면 안 돼요!”


인희가 정색하며 물었다.


“근데 너 왜 그렇게 그 사람 싫어하는 거니? 무슨 이유로?”

“그게... 암튼 절대 그 사람은 안 된다고요!”

“그냥 안 된다고만 하지 말고 이유를 말해줘!

내가 보기에 그 사람 성실하고 묵묵하고 사람 괜찮아 보이는데.

오늘 힘들어서 잠깐 그런 생각했었어.

그 사람하고 살림 합치면 이렇게까지 고생할 필욘 없을 텐데 하면서.”

“그 사람하고 결혼하면 엄마하고 나하고 다 불행해져요! 그러니”

“너 자꾸 쓸데없는 소리 하면 나 정말 실망한다!

해 보지도 않았는데 니가 어떻게 안다고 그렇게 말을 함부로 해.

너 그런 애 아니잖아? 왜 그러는 건데?”

“글쎄 제 말을 들으셔야 한다니까요! 뒤늦게 후회해도 소용없어요, 엄마!”

“니가 내가 알아들을 수 있는 이유를 대기 전까진 나도 이제 더는 양보 못 할 거 같아. 그 사람 만나볼래.”

“아... 정말! 그러지 말아요, 엄마! 제가 지금 합당한 이율 댈 순 없지만 제게도 사정이 있어서 그런 거니까 무조건 절 좀 믿어줘요!”


인희가 지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내 맘 이해하기 힘들 거야, 넌 남자니까.

여자 혼자 살면 사람들한테 업신여김 당하고, 나만 그런가, 너도 그렇고, 그래서 여러 가지 이유로 그 사람하고 합치려는 맘 갖는 건데.”

“이런 말 아시죠? 쓰레기차 피하려다 똥차에 치인다는 말?

바로 그렇게 된다고요. 그 사람하고 결혼하면요.”

“그러니까 내가 말하잖아. 뚜렷한 이유를 대 보라고.

그 사람이 무슨 범죄를 저질렀다디? 아니면 도박이나 그런 거 한다디?

아님 주사가 있다고 그러디?”

“네. 지금 엄마가 한 말 중에 그 사람이 하는 게 있어요. 분명하게!”

“그래? 그게 뭔데?”

“그 사람 주사도 있고, 보기완 다르게 의처증도 있고, 폭력적인 성향이”


인희가 완전히 실망한 표정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며 말을 끊었다.


“기남아! 난 생전 첨으로 너한테 크게 실망하고 있어, 지금!

나도 못 들어본 말을 학교 다니느라 바쁜 니가 어디서 들어봤다고 그런 말을 지어내고 그러니?

아무리 엄마가 염려돼도 그렇지 난 니가 그렇게 말 함부로 하고 그런 아인 줄 몰랐어, 정말!”


기남은 기운이 빠졌다. 아니 죽고 싶을 만큼 절망했다.

자기 말을 믿지 못하는 인희를 탓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는 걸 그녀에게 말해 봤자일 테고.

해서 기남은 인희를 설득할 수 있는 다른 방법을 찾아봐야겠다고 결심했다.


***


며칠 후 기남은 유영산으로 가 박흥식을 만났다.


“형! 나 요즘 정말 죽을 맛이야.”

“왜? 무슨 일 있어?”

“그게... 우리 엄마가 내 말을 듣질 않으시네. 내가 그렇게 말려도 불행한 일을 자초하시려고 하고 있어.”
“불행한 일? 무슨 일인데 그래?”
“사실 형한테 얘기해도 형도 이해하기 힘들 거야. 그래서 나 혼자 속 푹푹 썩고 있어.”

“허 녀석! 좀 알아듣게 말해주면 안 되냐? 집안 사정이라 그런 거면 어쩔 수 없는 거지만.”

“아냐, 됐어! 형 얘기나 하자. 어때? 이제 봄도 왔으니 이사할 준비는 됐겠지?”

“응. 그게....”

“왜? 아직도 설득 못 한 거야?”

“어. 그게 생각같이 쉽지 않네. 어머니랑 순애가 워낙 단호해서 말이야.”

“형까지 정말 왜 이래? 나 정말 힘들다!”


순간 기남은 이렇게 내뱉고 말았다.


“형이 어머니하고 동생한테 말해. 이번엔 천막촌이 아니라 그래도 제대로 된 집이라고. 비록 판잣집이긴 하지만.”

“어? 우리가 돈이 어딨어? 우린 그럴 처지 못 돼!”

“내가 빌려줄게. 나 돈 있어!”

“니가 무슨 돈이 있어? 집을 살 돈이 있다는 거야 지금?”

“응. 나 집 나올 때 그동안 아버지가 준 돈 모아둔 거 가지고 나왔는데 그 정도면 판잣집 정돈 살 수 있어.”
“그렇더라도 내가 어떻게 그 돈을 받아. 절대 안 돼!”

“아 제발 그런 소리 그만 좀 해! 우리 사이에 완전히 준다는 것도 아니고 빌려준다는데 왜 그래 정말!”

“그래도 그 돈이 너한테 어떤 돈인지 잘 아는 처지에... 안돼!”


박흥식은 단호하게 거절했다.


“형! 제발 내 말 좀 들어주라! 일단 이사부터 가고, 그리고 거기 가서 일 잘 풀리면 금방 갚을 수 있을 거야.

아니! 금방 갚지 않아도 돼! 난 당장 돈 필요 없으니까!”


박흥식은 기남에게 미안해 계속 거절의 뜻을 밝혔고, 답답한 기남은 그를 설득하기 위해 젖먹던 힘까지 쥐어짜고 있었다.

그러다 겨우 승낙을 받은 기남은 날아갈 듯 기뻐하며 그곳을 떠나 집으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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