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각은 신이 준 선물일까
긴 연휴가 지나갔다. 가족을 만나고, 친척을 만나고, 오랜 친구들과도 얼굴을 마주했다.
오랜만의 웃음 속에 묻혀 있던 기억들이 불쑥 고개를 들었다.
삼십 년 전의 서운함, 이십 년 전의 후회, 십 년 전의 민망함이 차례로 문을 두드렸다.
잊었다고 믿었던 일들이었다. 그러나 누군가의 말 한마디, 식탁 위에 오른 음식 냄새 하나가
오래된 기억의 자물쇠를 열어버렸다.
그 순간 문득 생각했다. 망각은 정말 신이 준 선물일까.
그렇다면 나는 그 선물을 아주 조금만 받은 사람일지도 모르겠다.
잊고 싶은 기억은 좀처럼 희미해지지 않고, 사소한 기쁨들은 너무 쉽게 사라진다.
좋은 기억은 빛바래고, 아픈 기억은 이상하리만치 생생하게 남는다.
그것이 어쩌면 인간의 숙명 같은 것일지도 모르겠다.
좋은 기억은 삶의 연료가 된다. 힘든 날이면 그 기억 하나가 마음을 데우고, 다시 걸어갈 용기를 준다.
그러나 아픈 기억은 다르다. 불쑥 찾아와 마음을 흔들고, 때로는 아무 이유 없이 하루를 무겁게 만든다.
다 잊었다 싶을 때쯤, “나 아직 여기 있다”는 듯 불쑥 나타난다.
그렇다고 완전한 망각이 꼭 축복인지는 모르겠다.
아픈 기억이야말로 나를 성장시킨 흔적이고, 같은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게 만드는 울타리이기도 하다.
그래서 요즘은 억지로 잊으려 하지 않는다.
대신 '조용히 잘 두는 법’을 배우려 한다.
아픈 기억은 마음의 서랍 속 세 번째 칸쯤에 넣어두는 것이다.
필요할 때만 조심스레 꺼내 보고, 다시 제자리에 돌려놓는다.
너무 자주 들춰보지도, 완전히 잠가버리지도 않는다.
그렇게 거리를 두면, 기억이 나를 흔드는 대신 내가 기억을 다스릴 수 있다.
결국 망각은 신이 내린 선물이라기보다, 인간이 익혀야 하는 기술이 아닐까.
완전히 잊지도, 끝까지 붙잡지도 않는 기술. 그 사이 어딘가에서 균형을 잡는 일.
어쩌면 신은 우리에게 완전한 망각 대신, ‘견딜 만큼의 망각’을 허락했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그 적당한 망각 속에서 아프지 않게 기억하고, 기억 덕분에 조금씩 단단해진다.
그리고 그렇게, 다시 오늘을 살아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