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농 아낙의 산골 결혼기념일

"달리 줄 것도 없네"라며 내민 것은....

by 배동분 소피아

봄부터 거름을 주고 밭을 갈고 골을 타고 씨를 뿌리느라 정신없는 나날이었다.

귀농하고 그나마 많이 심은 것이 고추이다.


유기농으로 지으니 풀과의 씨름으로 해질 날이 없다.

그렇게 애지중지 키운 고추가 바람에 많이 부러졌다.


저도 안 부러지려 애를 써서인지 부러진 놈의 다른 줄기도 얼굴이 노랗다.

고추줄은 그래서 쳐준다.


일일이 고추 4~5주마다 지주대를 박아 주고 그것을 기둥으로 삼아 줄을 쳐준다.

허리를 구부정하게 하고 하는 작업이라 보통 허리가 아픈 일이 아니다.


주인의 손을 기다리지 못하고 부러진 놈은 저대로 서운한 모양인지 땅에 온전히 몸을 붙이지 못하고 어미 몸에 부러진 채 붙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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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 한 점 없는 날.

한 줄 한 줄 하다 보니 어느 새 반은 했다.

지금은 귀농 초반이니 뭐든 힘이 들고 손에 익숙지 않아 더 애를 먹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도 몸에 익숙하려면 세월 밥을 먹어야 한다는 것을 안다.


기다리는 일부터 해야 하는 것이 농사이니 농사는 모든 철학을 다 품은 중차대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더 이상은 허리가 바쳐주지 않으니 그만 내려올 수밖에 없다.

내일까지는 꼬박해야 되는데 밤새 바람에 잘 버텨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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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무엇에 길들여진다는 것은 무서운 일이다.

길들여진다는 건 생각 없이 당연히 그리해야 되는 것으로 아는 것이기 때문이다.


용감한 귀농을 했다며 지인으로부터 선물로 받은 우리 집 멜라뮤트도 밖의 수도에서 물소리가 나면 늑대소리를 내며 짖는다.

초보 농사꾼이 제 밥을 챙겨주기 전에 꼭 물을 길어다 주었기 때문이다.


개집을 집 가까이에서 멀리로 옮겼는데도 그 행동은 여전하다.

하물며 사람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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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우리가 결혼한 지 10년째 되는 날이다.

귀농 전, 서울에 살 때야 며칠 전부터 각자 잔머리 굴리기에 바빴다.


눈치껏 제 속셈을 관철시키기 위해서는 미리부터 이미지 관리, 표정관리, 분위기 관리를 해야 했기 때문이다.


하루 전날 슬쩍 '선물 욕구’를 풍기면 거의 대부분은 미끼에 걸려들었고 서로의 주머니 사정에 관계없이 그 욕구를 충족시키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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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곳 산골로 귀농하고는 뻔한 상황에서 며칠 전부터 잔머리 굴릴 일이 없으니 속편 하다.


단지 남편이 이 산골로 온 후 그 날을 기억할까 하는 것만 궁금했었다.

오늘은 고추줄을 매어 주기로 한 날이라 계획대로 고추줄을 넣은 배낭을 하나씩 등에 메고 줄을 띄웠다.


태양은 정수리에서 자꾸만 아는 체를 하니 온몸에 땀이 범벅이다.

워낙 더운 날이라 '오늘이 결혼기념일’이라는 기억도 나부터 오락가락할 정도였다.


남편이 저 쪽에서 매던 끈을 놓고 오기에 담배 한 대 피우려나 보다 했다.

“선우 엄마, 축하해. 달리 줄 것도 없네”

하며 쑥스럽게 내미는 것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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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 개망초꽃

평소에 하도 흐드러지게 피기에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는데 하얗고 작은 것이 향기는 그윽하여

가슴 구석구석에 박힌다.

아,,,,,도시에서의 그 어떤 선물이 이에 비길까?


귀농 주동자인 남편은 마음이 야물지 못한 아내의 얼굴에 흐르는 속내를 읽으려고 애쓰는 표정이다.

하얀 선물을 들고 잠시 서있었다.

감정이 제 갈길을 못 찾고 헤맨 탓에.....

1-IMG_6866.JPG (개망초 위에서 명상중인 잠자리)

우리 둘은 밭고랑에 앉았다.

그러자 축하공연이 시작되었다.


해님은 조명을 맡았고, 구름은 소품 담당, 나무와 바람은 음향 담당.

고추잠자리와 나비가 춤을 추더니 이름 한 번 불러 주지 못한 새들도 제 목청껏 노래를 불러 주었다.


무대를 장식한 꽃들은 향기를 뿜어내기에 나 만큼 땀을 흘리고 있다.

밭가에 아주 작은 냇물도 한 목소리 한다.


주위를 한 바퀴 둘러보는 눈가에 흐르는 맑은 물을 훔치며 나도 나의 고마운 친구들에게 답가를 불렀다.


“내가 살아가는 ♬동안에 할 일이 또 하나 있지.

바람 부는 벌판에 서있어도 나는 외롭지 않아♪♬......”


도시에서는 지금 이 시각쯤이면 아파트에 꽃바구니와 케이크, 카드가 배달되었을 테지만 그런 것은 없어도 내 마음의 구석진 부분까지 읽어 주는 친구들이 있으니 마음 든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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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생각을 하는 동안 정말 선물이 배달되었다.

4시경에 배달되는 나의 산골 아이들.

이 이상의 선물은 없다.


학교 차가 저 아래까지 데려다주면 둘이서 놀며 돌아오는 아이들...

지에미, 아비가 집에 안보이자 밭으로 직행한 결혼 기념 선물을 끌어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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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하 공연하느라 비지땀을 흘린 친구들도 같이 안아 주었다.

남편은 선물도 배달되었으니 그만 집으로 돌아가잔다.

하늘, 바람, 구름도 등을 떠민다.

아이들도 좋아라 고추잠자리 앞세우고 집으로 향했다.


남편은 산골 오두막에 촛불을 켜고 주현이에게 축하곡을 부탁했다.

서울에서 피아노를 배우다 산골로 내려온 후 배움을 중지한 초등 1학년인 딸아이는 밑천이 별로 없는 것이 당황스러운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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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는 게 ‘징글벨’ 외에 몇 곡이 전 재산.

산골에 울려 퍼지는 한여름밤의 ‘징글벨’ 소리...


사람이 무엇에 익숙해진다는 것은 무서운 일만은 아니다.

난 이리 익숙해질 것이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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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하늘은 나더러 더 맑아지라 한다.

별들은 나더러 더 푸르른 꿈을 가슴에 안으라 한다.


산골에서 배 동분 소피아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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