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원까지 보낸 막내딸이 귀농한다고 하니...
법정스님께서 이해인 수녀님께 "수녀님은 그래 시를 쓴다고 하면서도 기껏 아는 게 뻐꾹새 소리밖에 없느냐"고 하시며 일일이 새이름을 구별해 가르쳐 주셨다듯이 나 역시 새소리는 뜸부기, 까치,참새, 까마귀 소리밖에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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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누군가 설령 열심히 알려줘도 그 소리가 그 소리같고 그 모습이 그 모습같아 난처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그 뿐인가.
나물이름, 들꽃이름도 매한가지다.
특히 나물이름은 더 까막눈이라 왼손에 아무리 이웃 형님이 알려줘도 외둘수가 없으니 사람이름 기억못하는 것도 한심한데 나물이름, 새이름 등 이름이란 이름은 죄다 기억을 못하니 그 분야는 여간 능력에 부치는 것이 아니다.
귀농해서 알게 된 이웃 형님의 놀림도 놀림이지만 이곳 산골에서 뿌리내릴 사람이다보니 내 자신 실망스럽기까지 하다.
오늘은 이웃 형님이 샘플로 뜯어 준 것이 시들어 꼬부라지도록 똑같은 것을 못뜯었다.
나물과 새와 들꽃들과 정말 친해지고 싶은데 잘 안되니 그 친구들에게 미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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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들이 하나같이 하는 말이 있다.
"공부는 엄마주려고 하니? 너 위해서 하지."
내가 한국생산성본부에 첫 여자 연구원으로 입사했을 때 엄마에게 말했다.
"엄마, 난 사실 학교다닐 때 정말이지 엄마위해 공부할 때가 많았어. 그 정도로 엄만 내게 헌신적이셨지."
그 말은 사실이었다.
여느 엄마가 자식에게 헌신적이지 않을까마는 얼굴이 안개꽃처럼 하얀 내 엄마는 당신은 없고 오직 자식만 있었다.
내가 대학, 대학원을 다닐 때, 어쩌다 한 겨울 새벽에 도서실가는 것이 귀찮아 포기하려다가도 내 엄마가 새벽부터 도시락 싸놓고 자식 머리맡에서 시계의 초를 세고 계시는 모습이 가슴저려 졸면서 도서실갈 때가 부지기수였다.
또 개인주택에 산 탓에 한 겨울, 자식이 신을 신발을 미리 방안에 갖다 놓으시고는 혹여 덜 따뜻할세라 당신 옷으로 덮어두시는 엄마를 생각하면 도서실에서 잠시 졸다가도 벌떡 일어나 앉곤했었다.
그 덕에 이 머리로 대학. 대학원을 수석 졸업할 수 있었다.
엄마는 늘 "여자도 많이 배워 활동적인 여자가 되어야 한다"고 하셨다. 그래서 유학도 자신있으면 해보라고 부추겨서 아버지에게 시집이나 보내지 쓸데없는 소리한다며 핀잔을 들으시기도 했다.
결국 엄마의 그 응원 덕에 일본유학을 계획하고 사전답사도 다녀왔었다.
그러던중에 지금의 남편을 만나 결혼하느라 유학을 덮어놓고 있었다.
그렇다고 우리 엄마가 공부를 독하게 시키는 엄마였냐 하면 전혀 아니다.
내가 깨워달라는 시간에 깨워준 적이 없었다.
자식이 달게 자는데 어떻게 깨우느냐는 것이 그 이유였다.
늘상 '오늘은 잠 좀 실컷 자고 도서실이고 뭐고 가지 말라'고 하시는 분이었다.
자식에 대한 교육열과 사랑은 넘쳐났지만 모질게 닥달하는 분이 아니셨다.
그저 선하디 선한 충청도 종갓집 맏며느리셨다.
몇 달 전에 풍을 맞으신 엄마를 보기 위해 서울에 갔었다.
시원찮은 발을 끌며
"막내야, 그 때 유학을 더 서둘러 보냈더라면 벌써 다녀왔을텐데...."하셨다.
귀농하여 산골에 들어가 뙤앝볕에 고추밭 매고 산야초 채취해서 산야초효소(산야초발효액)을 만들고 산나물을 뜯으러 다니는 막내딸이 가슴에 저려와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앉아 있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라며 눈에서 맑은 물을 흠치셨다.
그 때 내 가슴은 두릅나무 가시보다도 더 큰 가시가 파고드는 것같았다.
그 때 보았다.
우리 고추밭골보다도 더 깊이 깊이 패인 엄마의 주름을...
그도 그럴 것이 엄마는 충청도의 어느 종가집 맏며느리셨다.
머슴까지 합쳐서 13명이나 되는 가족의 뒷치닥거리를 다 해야 하는 전형적인 종가집.
충청도 천안 병천에서 부족함없이 사셨지만 이런 시골에서 살다가는 딸 다섯을 다 시골남자와 결혼시키겠다 싶어 밤마다 아버지 옆구리찔러 서울가자 하셨었단다.
말도 안되는 소리라고 일축하시던 아버지도 결국 엄마의 끈질긴 설득 끝에 아이들을 서울에서 공부시켜 서울남자와 결혼시키겠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서울로 올라오게 되었다.
그때 난 코흘리개였고.
그렇게 해서 대학원까지 가르쳐놓았더니 결국 막내딸이 다시 귀농해서 산골로 들어가 농사짓는 모습을 보게 되었으니 그 에미의 가슴은 어떠했을까.
그 생각만 하면 어느새 정수리가 뻐근해지고 목구멍이 불덩이로 막히는 것같다.
병든 엄마가 보고싶을 때마다 읽는 글이 있다.
피천득선생님의 '엄마'라는 글이다.
"엄마가 나의 엄마였다는 것은 내가 타고난 영광이었다....
내 기억으로는 그는 나에게나 남에게나 거짓말한 일이 없고, 거만하거나
비겁하거나 몰인정한 적이 없었다.
내게 좋은 점이 있다면 엄마한테서 받은 것이요,
내가 많은 결점을 지닌 것은 엄마를 일찍이 잃어버려
그의 사랑 속에서 자라자지 못한 때문이다."
이 글을 맨 처음 읽었을 때 산골에서 많이 울었다.
이 밤에 혼자 중얼거려본다.
'엄마 나도 엄마가 내 엄마라는 사실이 영광이야. 사람은 어느 하늘 아래에 머리를 두고 살든 착하게 넉넉한 마음으로 살면 행복한거야. 엄마, 너무 마음아파 하지마.
훗날 엄마도 내 등을 토닥이며 나의 결정에 박수를 보내도록 내 마음이 시키는대로 잘 살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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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과꽃같은 우리 엄마가 보고싶을 때 보려고 과꽃씨를 뿌렸다. 가뭄에 말라죽지 않고 흐드러지게 피어 이 산골이 엄마의 향기로 가득찼으면 좋겠다싶어......
도시에 있을 때에도 글을 썼었다. 책으로 내서 울 엄마에게 드리려고..... 이 곳 산골에 와서 더 열심히 쓰고 있다.
오늘따라 하늘에 별도 몇낱없다. 모두 지에미 품에 들어가 자는가보다. 바람도 자고 텃밭의 마늘들도 자겠지.
나도 자기 전에 병든 엄마에게 목소리 공양을 해야겠다.
엄마가 무척이나 보고싶던 날에.
(2001년도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