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미와 가시>
귀농하고 좋은 점은 내가 키우고 싶은 것들을 맘만 먹으면 키울 수 있다는 거다.
그것이 꽃이 되었든, 먹거리가 되었든, 동물이 되었든 말이다.
산골 데크 옆에 미니 장미 모종 하나를 심었다.
어찌나 성장이 더디던지...
아니 성장은커녕 목숨줄을 놓을까 조바심이 났었다.
겨우겨우 연명은 했으나 해를 거듭할수록 쭉쭉 성장하진 못했다.
내가 왜 이렇게 그 미니 장미에 온 에너지를 집중하는가 하면, 에른스트 슈마허의 '작은 것이 아름답다'는 말에 그 이유가 들어 있다.
경제학자인 슈마허의 그 말에는 사람은 자연의 일부임을 강조하고 있어서 더욱 좋아한다.
더군다나 난 무엇이든 '작은 것'을 환장을 하니 그 말을 안좋아할 수가 없다.
타샤 할머니 말에 따르면 장미에도 족보가 있단다.
한 송이에 어마어마한 돈이 나가는 장미가 있단다.
산골에는 한 송이에 투톤 칼라를 지녔다고 떠들어 대는 '찰스톤'과 오렌지 메이안디나와 프린세스 드 모나코가 있었다.
찰스톤과 오렌지 메이안디나는 연명만 하다 좌판을 접었고, 프렌세스 드 모나코가 겨우겨우 삶을 이어가고 있다.
그러나 난 발음도 어려운 이런 것보다 그냥 미니 장미를 좋아한다.
물론 찰스톤이나 혀도 잘 안돌아가는 긴 이름의 꽃들은 화려하고 덩치도 크고 하여 사람 눈에 확 띄지만 돌아서면 잔상도 잊혀지는 느낌이다.
그러나 미니 장미는 잔잔하게 마음으로 들어와 앉는 그레고리안 성가같아서 맘이 더 간다.
그래서 내가 가장 자주 어슬렁거리는 데크 옆에 미니 장미 하나 심은 거였다.
몇 해를 지켜보다 한 해에 유기농 퇴비를 한 포나 주었더니 그에 보답이라도 하듯 승승장구하고 있다.
귀농하고 이렇듯 나 좋아하는 것들 들일 수 있다는 것은 행운이나 그들의 목숨줄을 관장하고 있다는 사실은 내게 은근 부담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이 미니 장미를 볼 때마다 생각나는 시가 있다.
김승희 시인의 <장미와 가시>라는...
<장미와 가시>
눈먼 손으로
나는 삶을 만져보았네
그건 가시투성이였어
가시투성이 삶의 온몸을 만지며
나는 미소지었지
이토록 가시가 많으니
곧 장미꽃이 피겠구나라고
가끔 생각한다.
인생은 저글링을 하는 것 같다고...
행복과 고통, 환희, 슬픔 등이 순서대로 저글링 하듯 원하지 않아도 찾아온다.
내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순서대로 정신없이 돌아오기 때문에 우린 모두 그것을 받아들여야 한다.
김승희 시인말마따나 내 삶을 만져보니 가시투성이지만 '이제 곧 장미꽃이 피겠구나'라며 파릇한 희망을 가질 수 있는 시라서 옹알이할 때마다 힘이 생긴다.
우리는 저마다의 방법으로 살 구멍을 찾아야 한다.
난 시 한 줄의 긴 감동으로 살 길을 모색한다.
시 속 언어 하나하나가 반딧불이가 되어 내 소풍길을 안내한다.
'이토록 가시가 많으니 곧 장미꽃이 피겠구나....'
산골 다락방에서 배동분 소피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