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엄마

딸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우리 엄마

by 소피아

각 세대마다 붙여지는 이름이 있다. 50년대 이후 베이비부머 세대의 대표로 꼽히는 <58년 개띠>

우리 엄마는 58년 개띠다. 딱 그 세대의 삶에 맞게 살아오셨고, 그 세대의 생각을 고스란히 갖고 사신다.

빠르게 변화하는 인터넷 시대를 겁내 하시면서도 나름 열심히 살아오신 탓에 아직도 컴퓨터 앞에 앉아 경리업무를 보신다. 나는 엄마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을까?


딸 부잣집의 막내딸

딸 부잣집의 막내딸로 태어났다. 남아선호 사상이 심하던 시대에 아들을 낳기 위해 딸 5명을 내리 낳았던 할머니는 마지막으로 엄마가 태어났을 때 또 딸을 낳은 것이 속상해 3일간 젖도 안 물리고 엎어놓으셨다고 했다.

그때 제대로 관리를 못 받아 엄마 엉덩이에는 작은 상처가 남았다. 보이지 않은 곳에 남은 상처만큼 엄마 마음속에는 아들로 태어나지 못한 한이 남았을까? 오히려 아들이 싫다고 할 법도 한데 이모들도 엄마도 모두 아들을 더 선호한다.

첫째인 나를 낳았을 때 위로를 받고 남동생을 낳았을 때 모두 안도의 한숨과 함께 기쁨을 나누었다고 한다. 학창 시절 도시락 반찬을 보고 처음으로 엄마한테 화를 낸 적이 있다. 나는 아무거나 잘 먹는다고 매번 김치, 나물, 마른반찬에 도시락을 싸주셨는데, 어느 날 보니 동생은 소시지, 햄 등 맛있는 거 위주로 싸주었다. 그런데도 그걸 안 먹고 남긴다고 걱정하시는 엄마를 보며 너무 속이 상해서 "나도 햄 좋아해 ㅠㅠ"라며 울면서 말했던 것 같다. 그 얘기를 얼마 전에 했는데 기억이 안 나신다고 ㅎㅎㅎㅎ


엄마의 든든한 조력자 이모들

내가 초등학생 때 외할머니가 돌아가셨다. 하지만 언니들이 많은 우리 엄마는 외할머니의 빈자리를 느낄 틈도 없이 이모들의 케어를 받았다. 이모들이 우리 집에 놀러 오시는 날은 한바탕 대청소가 벌어진다. 늘 아기 같은 막내가 밥은 어떻게 해 먹고 사냐며, 집 꼬락서니는 이게 뭐냐며, 이모들은 온 집안 구석구석 청소를 하고, 냉장고를 정리하고, 맛있는 음식을 한가득 만들어 냉장고를 꽉 채워 놓고 가셨다. 잔칫날도 아닌데 냉장고에 가득 찬 반찬들을 보면 덩달아 나도 신이 났던 것 같다.

모두 넉넉한 형편이 아니었는데, 그나마 막내의 형편이 가장 나았던 것 같은데 이모들은 늘 막내를 챙기려고 한아름 먹거리를 챙겨 와 함께 나누어 먹었다. 그래서 나는 맛있는 음식을 실컷 먹을 수 있는 이모들이 오는 날이 너무 좋았다. 엄마는 이모들이 오면 거실에 나란히 누워 무슨 이야기가 그리 재미있는지 속닥거리며 밤을 지새우셨다. 지금 큰 이모가 80세를 바라보고 계신데도 이모들은 여전히 집에 오실 때마다 정리와 음식을 한바탕 하신다.

엄마가 몸이 아팠을 때도 동생 편히 쉬라고 이모 집으로 데리고 가서 먹고 쉬고 하며 치료에 전념할 수 있게 해 주었다. 그때는 내가 야근 많은 직장 생활을 하느라 집에 거의 붙어 있을 시간이 없었는데, 이모들한테 너무 감사했다.


엄마의 영원한 사랑 아빠

우리 부모님은 아빠가 군생활을 할 때 만나셨다고 한다. 다섯째 이모가 경기도 연천에 사셨는데, 그때 당시는 군사통제구역이라 마을에 들어가려면 초소에서 허가를 받고 가야 한다고 했다. 그 초소에 아빠가 근무를 했고 엄마는 이모네 집에 할아버지를 모시러 가는 길이었는데, 듣기로는 아빠의 부하들이 여자 친구 만들어 준다고 첫차에 아가씨가 있으면 초소로 내려 보낼 테니 잘해보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 첫차에 엄마가 타고 있었고 부하들은 엄마를 초소에 추가로 확인할 게 있다며 내려보냈고, 아빠는 엄마의 인적사항만 확인하고 다시 돌려보냈다. 그렇게 둘의 첫 만남이 있고 나서 엄마에게 아빠가 보낸 첫 편지가 왔다고 한다. 엄마는 이모를 통해 아빠에 대해 알아보았고, 나쁜 사람은 아닌 것 같다는 결론이 나자 둘의 본격적인 연애편지가 시작되었다고 했다.

엄마는 아빠와 주고받은 편지를 하나도 빠짐없이 가지고 계셨다. 나에게 한 번 보여준 적이 있었는데, 아빠는 웅변대회를 나갈 정도로 화술과 문장력이 뛰어나셔서 인지, 어린 나이에 내가 보기에도 엄마가 얼굴도 모르는 아빠에게 관심을 가질만한 내용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군인이었던 아빠와 연애하는 동안 편지가 너무 자주와 우체부는 엄마 이름을 외울 정도였고, 엄마 말로는 자칫 잘못하면 우체부 아저씨와 눈이 맞을 수도 있었다고 했다. 박정희 정부 때 8.15 저격 사건으로 휴가 중이던 아빠가 엄마를 만나러 왔다 급하게 부대 복귀를 하는데, 외할머니는 전쟁터에 내보내는 사람처럼 "자네, 어디 가서도 안부는 꼭 전하게."라고 했다는 말을 종종 하신다. 우여곡절 끝에 두 분이 결혼을 했고, 아빠는 제대 후 엄마와 단칸방에서 시작해 반지하, 빌라, 단독으로 집을 넓혀가며 살림을 키워가셨다.


엄마는 슈퍼우먼

아빠가 잘 다니던 대기업을 그만두고 사업을 한다고 나왔을 때부터, 엄마는 아빠를 도와 함께 사무실에 출근했다. 초등학생이던 나는 동생을 돌보며 집에 있었고, 엄마 아빠는 아침에 출근해 저녁때가 되어야 돌아오셨다. 혼자서 물 한잔도 안 떠 드시던 보수적인 아빠는 엄마가 살림도 잘하고 회사일도 다 잘하기를 바라신 건지, 아니면 사업의 스트레스를 엄마에게 푸셨던 건지, 같이 일하고 들어왔어도 쉴 수 없던 엄마는 점점 푸념이 늘어갔다. 아빠는 끼니때가 지나면 매우 예민해지셨는데, 엄마가 음식 할 시간이 없어 간단히 먹자고 내어놓은 밥상 타박을 하실 때도 있고, 동생이 학교에서 문제가 생겼을 때도 엄마가 애들을 제대로 못 돌봐서 그렇다며 화를 내셨다. 나라도 엄마를 도와드렸으면 좋았을 텐데 철이 없기도 했고 하루 종일 동생을 돌봤다는 책임감으로 긴장을 했는지 엄마가 오면 보상받고 싶은 마음에 더 어리광을 부렸다.

엄마는 아빠가 직장생활을 할 때도 집에서 과자값이라도 벌어본다고 부업을 하셨다. 부업의 종류는 다양해서 내가 기억하는 것 중에 빗살을 고무에 끼우는 것, 머리카락이나 먼지 뗄 때 쓰는 돌돌이 테이프 마는 부업도 했었다. 그러다 부업으로 인해 살림에 영향을 받자 정리하셨던 것 같다. 나는 그것도 모르고 엄마가 고무에 빗살을 끼우면 재미있다고 옆에서 같이 끼웠던 기억이 난다.

첫 사업이 부도가 나자 엄마 아빠는 우리를 재우고 술 한잔 하시며 울고, 위로하며 버티셨던 것 같다. 다시 시작한다고 빈 공터에다 판자로 사무실을 만들고 책상 한 개, 의자 한 개, 전화기 한 대만 놓고 둘이 트럭에 짐을 실어가며 일을 하셨다. 그래도 나는 예전 사무실은 차 타고 멀리 가야 했는데, 새로 얻은 공터는 집에서 걸어가면 있는 위치라 언제 든 엄마를 가까이 볼 수 있어 좋았다. 판자 사무실이 컨테이너 박스가 되고, 직원들이 늘어가고, 결국 더 넓은 터를 찾아 새로 건물을 지어 사무실을 이전하고, 그렇게 안정을 잡을 때까지 엄마는 아빠와 함께 계셨다. 사무실에 경리직원이 들어오자 엄마도 조금은 여유가 생겼고, 아빠도 엄마의 든든한 지원 덕에 마음 편히 사업을 하실 수 있었던 것 같다. 그렇게 지금까지도 두 분은 함께 일을 하신다. 이제는 슬슬 은퇴하실 때도 됐는데, 함께 일하는 아들에게 100% 만족을 못하셔서 손을 못 떼고 계신다. 그동안 두 분이서 열심히 일군 사업장이라 더 애착이 가시는 것 같기도 하다.



손주바보 할머니

내리사랑이라고 했던가, 첫째 손주는 첫정이라며 이뻐하고, 둘째 손주는 본인이 산후조리기간 돌봤다며 더 애틋해하신다, 최근에는 친 손녀 보시는 재미에 흠뻑 빠져있다. 아이가 식혜 먹고 싶다고 했다고 바로 식혜를 만들고, 도토리묵 먹고 싶다고 바로 묵을 쑤고, 뭐든지 뚝딱뚝딱 만드는 할머니. 여름이면 마당에 물 받아놨다고 수영하게 오라고 하고, 겨울이면 눈싸움하게 놀러 오라 전화하는 할머니. 아이들에게 엄마는 어떤 할머니로 기억에 남을 까? 아이들은 할머니가 맛있는 것도 많이 해주고 잘 놀아줘서 좋다고 한다. 외할머니와의 기억이 거의 없는 나로서는 좀 부럽기도 하다.


나의 엄마

어려운 상황에도 열심히 잘 살아오셨다. 먹고사는데 부족함이 없게 자라게 해 주셨으니 감사하다. 여자는 대학 나와 직장 생활하다 시집가면 되지 무슨 공부를 더하냐며 나의 유학과 대학원 진학을 말리던 엄마에게 서운했던 적도 있다. 그렇게 눌러앉아 엄마 말대로 살았던 삶이 속상하기도 했지만 생각해보면 그건 핑계고 나의 노력이 없었던 것이 큰 것 같다. 나이가 드시니 점점 아프신 곳이 늘어나서 속상하다. 어느덧 늘어난 주름살과 더 이상 감추지 않아도 자연스러워진 흰머리를 보며 이제 엄마도 나이가 드셨음을 실감한다. 살가운 딸이 아니라서, 늘 먹고살기 바쁘다고 걱정거리만 더해드리는 딸이라서 죄송하다.

문득 엄마와 단둘이 미술관 구경을 갔던 날이 떠올랐다. 늘 검소하게 사느라 제대로 된 옷 한 벌이 없었지만 엄마가 가진 가장 예쁜 옷과 좋은 가방을 메고 함께 예술에 전당으로 갔다. 그림을 잘 몰라도 이렇게 문화생활을 할 수 있음을 기뻐했다. 명품은 사치라는 아빠의 지론에 따라 사업이 어느 정도 안정이 되었어도 남들 다 가진 흔한 명품백마저도 없던 엄마에게 아빠 몰래 월급으로 면세점에서 가방을 사드렸던 기억이 난다. 바쁘게 사시느라 마음은 있어도 선뜻 문화생활을 즐길 처지가 못되었던 부모님과 첫 연극 공연을 보던 날, 처음으로 딸 가진 기쁨이 이런 거라며 즐거워하셨다. 그때가 내가 생각하는 유일하게 효도를 했던 날인 것 같다.


엄마, 사랑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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