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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피아 Jun 14. 2021

안녕,우리 집

집과 함께 살아가고 있다

어떤 집은 공간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 <친애하는 나의 집에게> p. 123



나의 유년시절을 함께 했던 목동을 떠나오던 날이 떠오른다.

초등학생 때 아빠는 몇 번의 이사 후 큰 결심을 하고 집을 짓기로 결정하셨다.

내가 생각하는 집은 넓은 마당에 잔디밭이 있는 2층짜리 주택이었는데 막상 가서 보니 마당 없는 3층짜리 다세대 주택이었다. 아빠는 3층은 우리가 살고 1~2층에는 세를 주어 집을 짓는데 들어간 비용을 갚는데 쓰신다고 하셨다. 그 당시 아빠의 사업은 꽤 규모가 커져서 사무실 옆에 세차장까지 인수해서 운영을 할 때였다. 새 집으로 이사를 가고 집들이를 하던 날 잔치가 따로 없었다. 언제나 엄마의 든든한 지원군인 이모들이 오셔서 함께 음식 준비부터 손님 대접까지 도와주셨고, 어린 나도 잔심부름을 하느라 정신없었다. 3층에 상펼 자리가 없어, 옥상에도, 1층 주차장에도 자리를 펼 수만 있다면 펴서 손님을 대접했고 아빠는 누구보다 기뻐하셨다.


그러고 얼마 후 작은 어음으로 시작된 연쇄 부도의 끝에 우리 집도 있었다. 아빠의 사업은 부도를 냈고 이곳저곳에 돈을 빌리러 다니셨으며, 채권자들을 만나러 다니셨다. 어느 날 내가 학교에서 돌아왔을 때 우리 집에는 빨간색 압류 딱지가 곳곳에 붙어있었고 그때 당시 내가 가장 아끼던 피아노에도 빨간딱지가 붙었다.

우리 가족은 처음으로 다 같이 모여 목놓아 울었다. 밤중에 자다가 깨서 화장실을 가려고 나왔는데 작은 불을 켜놓은 주방에서 부모님의 한숨 섞인 슬픔의 목소리로 이야기를 나누시는 것을 들었다. 집을 팔고 고향으로 돌아가던가 온 가족이 뿔뿔이 흩어져서 살 수도 있다는 소리를 듣고 어린 마음에 걱정이 되어 잠못이룬 적도 있었다. 


운이 좋았던지 친척들의 도움을 받아 생활은 이어갈 수 있었고, 채권자들도 그동안 성실했던 아빠를 믿고 한 번의 기회를 준 덕분에 집을 떠나지 않고 살 수 있었다. 하지만 아빠의 화려하던 사무실은 정리를 했고, 집 근처 공터에 판자로 사무실을 만들어 책상 하나 테이블 하나만 옮겨둔 채 다 팔고 남은 트럭 하나로 두 분은 다시 시작을 했다. 부모님은 예전보다 더 바쁘게 살았으나 집과 사무실의 거리가 도보 이동이 가능한 거리다 보니 나와 동생은 엄마를 보고 싶으면 회사로 가면 됐으니 점점 안정을 찾았다.  부모님의 사업도 다시 안정을 찾기 시작해 판자를 허물고 컨테이너 박스를 새로 들였고, 직원도 채용을 했다. 


초등학교 고학년 때부터 살던 그 집에서 나는 대학을 졸업하고 회사에 취업할 때까지 살았다. 

내 방은 골목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우리 집에서 유일하게 막히지 않고 해가 잘 드는 곳이었다. 내 방 창문을 열면 동네가 한눈에 다 보였다. 여름이면 옥상에 올라가 평상에 앉아 고기도 구워 먹고, 수박도 잘라먹으며 밤하늘을 올려다보았고, 겨울이면 눈 쌓인 골목길에 동네 사람들이 나와 눈 치우던 모습도 볼 수 있었다. 짝사랑하던 옆 옆집 오빠가 가방 메고 학교 가는 모습을 보며 우연히 등하굣길에 마주치고 싶어 했던 날도 있었다.  

그 집은 나의 학창 시절을 지켜보았고, 서투른 풋사랑을 하는 나를 보았다. 사춘기에 방황하는 동생을 지켜보았고, 가족을 위해 열심히 살아가는 부모님을 지켜보았다. 


부모님의 사업장이 있던 땅이 개발로 인해 더 이상 이용할 수 없게 되어 새로운 사업부지를 찾으셨고, 그때 당시 아직 개발 전이었던 인천 변두리의 한 곳으로 사업장을 옮기게 되셨다. 집과 거리가 멀어지니 두 분은 힘들어하셨고, 이제 성인이 된 자식들 통학 걱정 없으니 과감하게 이사를 결정하셨다.  10년 넘게 살던 집, 그것도 손수 지어서 살던 집이라 더 애틋했던 부모님은 이사 오는 날 눈물을 보이셨다. 그 눈물은 슬픔이 아닌 지난 시절 아등바등 살아온 두 분을 바라보며 우리 가족을 버티게 지켜준 집과의 이별에 대한 아쉬움에 흘리는 눈물이었다. 우리가 떠나온 후 그 집은 허물고 다시 지어졌다고 들었다. 얼마 전 그 동네를 갔을 때 몰라보게 달라진 풍경에 낯설고 아쉬웠지만 빨간 벽돌로 지어진 3층짜리 집, 그리고 내 방의 창문은 오래도록 마음속에 남아있을 것이다.


나는 결혼 후 지금의 집에서 10년 넘게 살고 있다. 처음에는 이렇게 오래 살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는데 아이가 생기고 살다 보니 벌써 시간이 이렇게 흘러갔다. 요즘 우리 동네의 화두는 모두 신도시 입주다. 바로 옆동네에 신도시가 생겼고, 일단 착공에 들어가니 언제 지어질까 싶던 아파트들이 우뚝 솟아올라 있었다. 첫 번째 단지가 곧 입주를 시작하는데 새롭게 지어진 아파트와 정비된 길을 보고 있노라니 지금 내가 사는 이곳이 더 오래되고 낡게 느껴진다. 구도심 원주민이라고 불리는 상황이 된 것이다. 언젠가 이사를 가야지 막연히 꿈만 꾸다가 죽을 때까지 이 집에 사는 건 아닌가 겁도 나고, 한 집에서 10년쯤 살다 보니 여기저기 손볼 곳 투성이인데 이사 가고 싶다는 작은 희망 때문에 집에 돈을 들여 고치는 것에 선뜻 마음이 내키질 안는다. 

그 마음으로 벌써 2~3년이 흘렀는데, 이제는 포기하고 싹 고치고 살까 싶다가도 마음속에 자꾸 이사 가고 싶은 욕망이 올라온다. 


가난을 가늠하는 일은 자신의 과거든 타인의 현재든 비교대상이 필요했다.
마포의 30평대 아파트에 혼자 살고 있는 친구의 집을 다녀온 날, 나는 가난했다.
원룸에서 불과 몇 정거장 떨어진 난곡의 쪽방을 목도한 날, 나는 가난하지 않았다.
- <친애하는 나의 집에게> p.58


주변의 지인들이 모두 새 아파트로 이사를 가고 나면, 나는 한동안 마음이 가난해질 것 같다. 지금도 겉으론 괜찮은 척하지만 새집으로 이사하기 위해 가구와 가전을 바꾸고, 인테리어를 고민하고, 아이들 학교를 걱정하는 모습을 보며 내심 부럽다. 그럴 때마다 집에 돌아와 오래돼 떨어진 서랍장과 아이들 낙서로 엉망이 된 벽지와 10년의 세월을 감당하다 찢어져버린 소파를 보며 모두 버릴 것들이란 생각에 손 놓고 쳐다만 보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내가 살고 있는 이 공간을 사랑해야 집도 밝아지는 것을 알면서도 그저 이곳을 탈출하고 싶다는 생각이 가득한 것은 왜일까? 누가 나가라고 등 떠미는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닌데, 집에 돈을 쓰기 싫은 이유는 자꾸 곧 떠날 것 같은 마음이 더 커서일 것이다.  집의 소중함을 알면서도 집을 막 대하고 있다. 이래 놓고 막상 이 집을 떠나게 된다면 나도 추억이 담긴 이 공간에 대한 애틋함으로 눈물을 보이겠지.

신혼살림을 준비하고, 아이를 낳고, 남편의 힘든 시간을 함께 버티며 살게 해 준 이곳에 대한 고마움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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