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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ophia p Sep 03. 2020

쉬운 서양 철학 5

스피노자 VS 라이프니츠

스피노자는 삶의 주체란 자신의 삶을 유쾌하게 증진시키려는 의지, 즉 '코나투스'를 가진 주체라고 말했다. 코나투스가 정신에만 관계될 때는 의지라고 일컬어지지만 그것이 정신과 신체 동시에 관계될 때는 충동이라 일컬어진다. 욕망이란 자신의 충동을 의식하는 한 주로 인간에게 관계된다. 우리는 선이라고 판단하는 것을 향해 노력하고 의지하며 충동을 느끼고 욕구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노력하고 의지하며 충동을 느끼고 욕구하기 때문에 어떤 것을 선이라고 판단한다.
 
또 하나의 중요한 것은 스피노자에게 인간을 포함한 모든 사물이 가지고 있는 코나투스가 불변하는 실체와  같은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것은 타자와 우발적으로 마주치면서 증가하거나 감소할 수 있는 것이었다. 유한 자로서 인간은 타자와 어떤 식으로든 마주칠 수밖에 없고 거기에서 싫든 좋든 어떤 자극을 받게 된다. 당연히 이런 자극은 인간의 정신과 신체에 모종의 변화를 초래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자신의 코나투스를 증가시키는 관계를 포기하고 코나투스를 약화시키는 관계를 지속할 수 있다. 자신의 코나투스를 지킬 수 없을 때 의식은 인간 내면의 기쁨과 유쾌함을 순간적인 쾌락에 불과하다고 폄하할 수 있다.

라이프니츠는 스피노자와 전혀 다른 방식으로 소통의 문제를 해결하려 했다. 그는 우리가 타자와 소통할 수도 없고 소통할 필요도 없는 존재라고 주장했다. 그를 잘 모르는 사람도 '창이 없는 모나드'라는 표현을 한 번쯤은 들어보았을 것이다. 우리와 타자 사이에는 소통할 수 있는 '창'과 같은 통로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라이프니츠는 주어가 될 수 있는 모든 개체의 내부에는 그에게 앞으로 붙여질 모든 술어가 미리 내재되어 있다고 생각했다. 여기서 카이사르와 클레오파트라의 사례를 살펴보자. "카이사르가 클레오파트라에게 키스를 한다"라는 명제를 살펴보면 라이프니츠는 '카이사르'에게는 "클레오파트라에게 키스를 한다"라는 술어가 함축되어 있다는 것이다. 마치 '총각'에는 "결혼하지 않은 남자다"라는 술어가 함축되어 있는 것처럼 말이다. 카이사르는 자신의 의지에 따라 키스를 했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라이프니츠는 이런 생각이 단지 인간의 유한한 시선에서만 가능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라이프니츠의 주장은 가히 충격적이라 할만하다. 우리 모두 신이 만들어놓은 영화관에서 신이 만들어 놓은 영화를 보고 있는 모습이다. 이 고독한 영화관이 바로 창이 없는 모나드였다. 타인을 보지만 그건 영상일 뿐이다. 꽃을 보아도 그건 영상일 뿐이다. 전쟁을 목도하지만 그것도 영상일 뿐이다. 놀라운 건 옆의 타자 또한 그렇게 하고 있다. 그러니 우리가 느끼는 희로애락은 얼마나 덧없는 것인가. 스마트폰과 컴퓨터 화면을 고독하게 쳐다보며 가상세계에 빠져 있는 우리를 보자. 실재 세계는 모조리 증발하고 이미지만이 우리를 둘러싸고 있다. 그럼에도 우리는 세계와 소통하고 있다고 믿고 있다. 신의 예정 조화설이 자본과 체제의 예정 조화설로 현실화된 셈이다.

스피노자가 관계의 외재성이라는 테마를 따르고 있다면 라이프니츠는 관계의 내재성이란 테마를 취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관계와 소통은 내재적인가, 외재적인가? 결국 이렇게 정리할 수 있다. 관계의 외재성이 타자에 의해 결정되면 관계는 내재해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말이다. 쉽게 말하자면 우리의 관계와 소통이 타자에 의해 결정된다면 그 관계는 내부에서 일어난다는 것이다.

스피노자의 소통의 예로 도박이나 약물중독 등을 들 수 있다. 자신의 삶에 기쁨과 유쾌함을 순간적으로 주는 이러한 행위를 기쁨이나 행복이라고 착각하는 것이다. 인간으로 하여금 자신의 코나투스를 약화시키는 관계를 지속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의식의 잘못된 인식을 수정해서 우리를 긍정하는 삶으로 이끌려는 것 이것이 스피노자의 생각이었다.

라이프니츠의 세계관에서 나는 매트릭스라는 공상 과학 영화를 떠올렸다. 매트릭스는 하나의 가상현실로 인간의 기억과 생활 모든 전반을 매트릭스가 프로그래밍한다. 우리가 느끼는 고기의 맛 하나하나까지 프로그래밍된 세상에 살고 있는 것이다. 이것을 알게 된 주인공은 이걸 그대로 받아들일까 아니면 사람들에게 알려서 체제의 전복을 꾀할까? 나 같으면 어땠을까? 용기가 없어서 그냥 살기를 원하지 않았을까.


참고서적: 강신주 철학 VS 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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