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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피아윤 Sep 24. 2024

콤플렉스의 미덕



어려서부터 성장이 빨랐던 나는 내 몸의 2차 성징의 발현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기보다는 어떻게 하면 남들이 입지 않은 속옷이 티가 나기 않을까를 고민하며 풍덩한 옷 입기와 구부정한 자세를 취하였다. 또, 유독 하얀 피부가 돋보이기도 전에 그 위에 앉은 까만 깨들이 반짝이는 탓에 놀림도 꽤나 받았는데 그 주근깨를 가려 보려고 엄마 화장품을 발랐다간 '발랑 까진 계집아이'라는 소리를 들을 것만 같아 낯선 곳에서는 얼굴도 잘 들지 못하는 소심한 성격을 선택하게 되었다. 게다가 한참 크느라 그랬는지 자다 일어나 헛소리와 잠꼬대가 심한 나에게 기력회복을 위한 한약을 지어 먹인 엄마 덕분에 일년에 10킬로나 쪄서 더 커진 덩치로 나의 외모에 대한 콤플렉스는 최고점을 찍었다.

지금이야 4~5학년 정도 되면 성인 못지않은 성숙미에, 어린이용 화장품도 나오고 그 성숙미를 오히려 드러내는 문화가 있지만 내가 초등학교에  다니던 80년대 후반만 해도, 초등5학년의 성숙한 외모는 꽤 부끄러울 일이었다. 하지만 가만히 생각해 보면 나보다 조금 덜 성숙했던 내 친구는 굳이 입지 않아도 될 언니의 속옷을 입고 와서 뽐내었던 것을 보면 그 부끄러움은 내 개인의 문제였던 것 같다. 아무튼 나의 그런 외모 콤플렉스 덕분에 사춘기 시절 온통 외모에 신경 쓰는 친구들과는 달리, 난 외모에 신경을 끄는 아이가 되었다. 외적인 것에 관심이 없으니 당연히 내적인 만족을 채우는 데에 시간을 할애했고, 중학교 시절 학교와 학원을 다니는 일상 외에는 내가 추앙하는 '서태지와 아이들'만 있으면 행복한 아이였다. 또래 친구들이 삼삼오오 몰려다니면서 놀러 다니는 여가에는 크게 관심이 없었기에  '이성에 눈뜨는 시기'는 찾아오지 않았고, 엄마와 공연을 보러 다니고 집에서 책 보고 음악이나 들으며 집안에서 노는 아이였기에,  흔히 여자아이를 키우는 부모님의 걱정을 상쇄시키는 딸이 되었다. 고3 대학원서 쓰는 날,  가와 나군의 대학을 결정하고 마지막 다군에 어떤 학과에 지원할지 고민하고 있을 때 담임선생님이 "소영이는 얼굴도 이쁘고 이미지도 잘 어울리니까 호텔관광학과를 한번 써볼까?" 하셨을 때, 오히려 잊고 지냈던 내 외모에 존재감을 부여해 주심으로써 없던 치트키가 생긴 기분이었다.


대학에 와서는 나의 실력이 콤플렉스가 되었다. 공대에서 음대로 전향하며 입시레슨을 받은 기간 단 8개월.

어릴 때부터 계속 끊기지 않고 전공자 수준까지 연습해 온 나의 피아노 실력을 믿고 전향을 결심했지만, 문제는 피아노가 아니라 '작곡전공'을 택한 나였기에 8개월 동안 '입시를 위한 레슨'만 받고 대학의 문턱을 겨우 넘었다. 막상 학기가 시작되고 나니 나의 실력이 허무맹랑한 수준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외모처럼 신경 끄기의 기술로는 학교 생활자체를 할 수 없었고, 어렵게 이룬 음악생활을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동기들의 3~10년 정도 음악을 준비한 기간을 쫓아가려면 그동안 못한 나머지 공부를 하면 되겠다는 생각으로 1년 동안 잠을 안 자고 공부했다. 고2 때부터 4시간만 자고 공부했었던 습관이 아직 남아있었기에 크게 어렵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하지만 어느 날 버스에서 졸다 두 정거장이나 지나쳐 내려 집에 걸어가며 문득 내가 한 달가량 침대에 누운 적이 없었던 걸 떠올렸다. 음대로 전향하는 걸 집에서 좋아하지 않았었기에 나의 힘듬은 누구에게도 지지받지 못했던 나만의 숙제였고, 그날따라 고단함과 안쓰러움이 밀려와 광안리 바닷가에 앉아 하염없이 울다 집에 들어갔다. 그런 생활을 꾸역꾸역 해내다 보니, 점점  실기 실력이 좋아졌고 2학년 2학기 이후로 모든 전공실기과목에서 'A'학점 이하로 떨어져 본 적이 없었다.



그렇게 내가 원하던 음악공부를 했지만, 결국 난 수학선생님이 되었다.

음대 입시준비를 할 때, 같이 입시레슨을 받던 동생들에게 수학을 가르쳐 주던 것이 인연이 되어 대학 때에도 수학 과외와 피아노레슨을 병행하며 가르치고 있었고, 인생의 고비를 여러 번 넘기며 내 삶에 대한 책임을 지는 데에는 음악보다 수학을 가르치는 것이 효율적이었다. 그렇게 수학선생님이 된 후, 이번엔 '음대출신'인 나의 학벌이 콤플렉스가 되었다. 학습지 교사일을 할 때에는 학벌에 큰 콤플렉스가 없었지만, 본격적으로 수학 전문강사로 활동하면서부터는 공대 출신이라고 거짓말을 하고 다녔다. 학부모들이 일일이 졸업증명서를 요구하지 않았고 개인과외는 소개로 진행되는 경우가 많아서 굳이  학벌을 증명하지 않아도 되었지만, 늘 마음 한 구석엔 늘 찝찝함이 컸다. 그런 강한 콤플렉스로 인해, 더욱 실력 있는 수학선생님으로 자리매김했어야 했고, 일타강사들의 스킬을 훔치기 위해 수업을 끝내고 새벽 늦게까지 EBS와 온라인강의를 들으며 조마조마한 수학강사의 시간을 이어갔다. 그렇게 2~3년 지내고 나니, 수업에 대한 자신감이 생겼고 그 사이에 내가 맡은 학생들의 성장과정들이 하나하나씩 데이터가 쌓여 나만의 무기가 되었다. 십년이 넘은 지금은 처음 만난 학부모에게 자신 있게 밝힌다. "저는 음대출신 수학선생님입니다."라고.


사이토다카시의 '일류의 조건'에서 살아가는 힘이란 숙달에 이르는 보편적 원리 를 반복적 체험을 통해 기술로 만드는 것이라고 했다. 이 숙달에 이르는 보편적 원리를 기술화하는 데에는  훔치는 힘(모방), 추진하는 힘(의지), 요악하는 힘(요약력)이 필요하다고도 하였다. 여기서 내가 생각하는 것은, 이 세 가지를 실행하는 데에는 자기 의지가 필요한데, 그 강력한 의지는 바로 결핍(콤플렉스)에서 시작된다고 생각한다.

내가 애써 외면하고 싶었던 나의 외모 콤플렉스 덕분에 내면의 즐거움을 채울 줄 아는 내가 되었고, 수준 낮은 실력에 대한 콤플렉스로 포기하지 않는 태도를 배우게 되었으며, 학벌에 대한 콤플렉스로 부끄럽지 않은 선생님이 되기 위해 더욱 발전하는 내가 될 수 있었다.

콤플렉스 때문에 아무것도 못하는 내가 아니라, 그 자체를 인정하고 결핍을 없앨 수 있는 다른 대안이나, 결핍의 보충을 하려는 자유의지의 원동력으로 삼는다면, 언젠가는 노력에 대한 보답이 그 이상으로 다시 돌아온다는 것을 이제는 알고있다. 그래서 앞으로 또  다른 콤플렉스를 마주하게 된다면, 기꺼이 그의 미덕을 미리 받아들이려고 한다. 아주 감사하는 마음을 꾹꾹 담아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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