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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피아윤 Sep 25. 2024

행복을 위한 관계 끊기

슬픔을 이기는 법

자랑은 아니지만, 내가 인생에서 가장 잘한 일은 이혼이다.

누군가가  이혼 때문에 내 아이들에게 결핍을 주고 나의 부모에게 불효를 한 것이라고 말하고 싶다면, 그건 다른 차원의 일이다. 나는 이혼을 통해 내 자아를 지킬 수 있었고, 가스라이팅에서 벗어났으며, 무의식조차 억압된 공황장애에서 해방되었다. 아주 오랫동안, 나 한 사람의 희생으로 가족 모두가 행복할 수 있다면 기꺼이 그러겠다고 다짐했다. 하지만 그 결심이 나를 망가트렸고, 내 삶을 송두리째 앗아갔다. 


신혼 초부터 시작된 시집살이. 전남편의 아버님이 홀연 단신 고아라는 핑계로 결혼해서 같이 살자는 것에 큰 고민 없이 결정했으나, 천진난만한 전남편은 결혼을 한 후에도 독립된 행동이나 마음가짐이 없었다. 물론 그의 어머니가 아들을 그렇게 키웠기에 당연한 것이었다. 삶이 힘들고 고단했을 때 만나서 그런지 연애할 때 나와 다른 그의 밝고 해맑은 모습이 좋았던 나였기에 결혼해서도 늘 나를 웃게 해 주겠지 했었다.  더구나, 연애할 때 결혼을 서둘렀던 전남편의 어머니는, 결혼 전 내 자취방으로 반찬이며 용돈이며 알뜰살뜰 챙기는 모습에 같이 살아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막상 결혼날짜가 잡히고 결혼준비를 하면서 본색이 드러났다. 같이 살면서 우리의 수입은 본인이 다 관리해 주겠다, 너흰 용돈 50만 원만 써라,  신용카드는 하나만 만들어라 등등 간섭 아닌 간섭이 시작되었고, 친정부모님이 부산에 계셔서 예물 준비며 한복 등 일일이 함께 하시길 바라서 동행하면, 가는 곳곳 싸움이 일어났다. 말 그대로 쌈닭이었다. 세상의 모든 것을 본인이 정한 울타리 안에서만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돌아서서 늘 어른이랍시고 우리에게 하는 말은 "세상은 다 적이다. 가족 말고 믿지 마라."였다. 그런 사람이었으니 내가 들어갈 틈이라도 있었겠는가.. 그들의 삶에 내가 섞여서 새로운 가정이 되는 것이 아니라, 좁고 이해되지 않는 그들의 결속력 사이를 내가 스스로 비집고 들어가야 했다. 들어가지 못해  겉도는 나를 배려해주기는 커녕, 핍박과 무시로 늘 공격의 대상이 되었고, 내가 살을 에워내며 비집고 들어간 틈조차 혹시나 나로 인해  더 벌어질까 두려움에 '넌 이제 내 거니까 내 말만 들어'라는 독재자의 바닥에 엎드려  12년을 살아왔다. 


그러는 동안 나의 전 남편은 늘 방관자였다. 살아보니, 그는 고민 있으면 엄마가 해결해 주는 사람이었고, 결혼하면 그 해결을 내가 대신해줄 거라 생각하는 사람이었으며, 내가 못하겠다고 하면 "엄마한테 말하자."로 끝을 맺는 사람이었다. 12년의 세월 동안 나의 아이도 그녀의 손주였고, 나의 남편도 그녀의 아들이었으며, 나를 딸이라고 생각한다는 가증스러운 관계표현으로 본인의 손주를  교육시키고, 밥 먹이고, 그녀의 아들을 챙기는 유모이자 식모쯤으로 취급했다. 아이 낳고 일을 본격적으로 다시 시작하려고 하자 "여자벌이 서푼 벌이다"며 하루종일 심심한 본인과 놀아주길 바랐고 자신의 비서쯤으로 나를 부렸다. 명절이면 시집간 딸과 우리가 늘 완전체로 뭉쳐서 연휴 내내 같이 시간을 보내야 했으며, 본인 딸은 시댁에서 명절 차례만 달랑 지내고 오는 것이 당연하고, 나는 제사도 안 지내는 시댁에서 연휴 내내 함께 있어야 하는 게 당연한 사람이었다. 십 년이 넘는 결혼생활 동안 친정에 가 본 것이 열 번이나 될까.. 친정은 고사하고 친구조차 만날 수가 없었다. 결혼 초반에 남편 친구들과 부부동반 모임을 하러 갔을 때, 몇 시쯤 집에 올 거냐는 질문에 한 '"저녁 10시 정도 될 것 같다"라고 했더니, 10시가 지나자 10분 간격으로 전화를 하던 여자였다. 그런 경험이 몇 번 쌓이자 그 스트레스가 더 커서 모든 만남을 거부했다. 그러는 동안 '나'는 사라졌고,  하루하루 시간이 지날수록 도무지 이해되지 않고 발전이 없는 그 이상한 곳을 탈출하고 싶었다. 무엇보다 억압된 나의 자아가 더 이상은 참을 수 없었다. 갑갑한 마음에 15층 베란다에서 1층 정원을 내려다보는데, 갑자기 잔디밭이 쑥 올라왔다. 내가 좋아하는 고무나무 화분이 여기 와서 만져봐 하고 여린 잎을 반짝일 때 그것을 만지려 베란다 난간에 걸터 올라가는 나를,  무의식의 손이 끌어내렸다. 아직도 그 순간, 손만 뻗으면 잡힐 것 같은 그 화분이 쑥 다시 1층으로 떨어지는 장면이 잊혀지지 않는다. 


물론 이혼 이후 나의 삶은 편안하지 않았다. 이혼 후, 12년 동안  정상적인 삶을 살지 못한 숙제를 끝내야 했고 (인연이 끊긴 나의 친정과도 회복이 필요했다), 그들과 관계를 정리하는 대가로 나는 무일푼에 빚까지 떠안았으며 나의 사랑하는 아이들과도 인연을 끊어야 했다. 이혼 후 대략 3년 정도 하루 5시간도 못 자면서 미친 듯이 일을 했고 어떤 국가적 배려의 절차도 거치지 않고 온전히 혼자만의 힘으로  어려운 과업(빚청산)과 힘든 마음정리가 어느 정도 끝난 후에 지금의 남편을 만났다. 


남편이 재혼 이야기를 꺼냈을 때, 그동안의 트라우마로 인해 시부모가 될 그의 부모님이 걱정되었다. 하지만 그 걱정이 무색하게 내가 그동안 너무 시집살이를 해서 하느님이 상을 주신 것 마냥 친정보다도 더 편안한 시댁을 선물해 주셨다. 지금의 남편은 정말 외동아들인데 (딸도 없고 오롯이 아들 하나뿐이다). 누구보다 독립적이며 부모님 또한 전혀 간섭이란 걸 모르신다. 오히려 뭘 하나라도 도와주려고 생각하시고, 우리가 대접하는 사소한  식사나 여행 등을 당연히 생각하시는 게 아니라 너무너무 고맙게 받으신다. 벌써 새로운 가족이 생긴 지 5년이 되었다. 나의 남편은 욕심이 없는 사람이라 내 성에 좀 안 차긴 하지만 누구보다 내가 우선순위인 사람이고 그건 나도 역시 마찬가지이다. 서로 다른 라이프스타일은 인정해 주고 어떤 면에서는 독립적인 관계를 유지하는 합리적인 태도 덕분에 우리 부부는 꽤 합이 잘 맞는다. 모든 순간을 함께하고 싶은 남편과는 다르게 나는 나만의 시간이 필요해서 내 시간을 확보하는 대신, 그 외의 모든 시간은 거의 남편과 함께 보낸다. 주말에 스케줄만 맞으면 대부분 시부모님과  함께 캠핑 가고, 명절에도 당연히 같이 여행을 다닌다. 여행도 귀찮을 땐 시댁으로 놀러 간다. 펜션보다 더 좋은 시댁에 힐링하러 다니는 며느리.. 난 진짜 복 받은 것 같다. 어머님도 마찬가지로 대접 한번 못 받아 보시다가 나를 만나서 너무 좋다고 가끔 금붙이를 주신다. 재혼 후 첫 아버님 생신 때 생일 상을 차려드렸더니, 생전 처음 받아 보는 거라고 해서 너무 놀랐던 기억이 있다. 모르는 사람들은 시댁이랑 불편해서 어떻게 여행을 같이 다니냐고 하지만, 서로의 결핍을 아는 사람들은 그 소중함을 알기에 더욱 배려해 주는 관계가 된다. 


그래도 내 안의 깊은 슬픔은 없어지지 않는다. 판도라의 상자처럼 절대 열지 않을 뿐이다. 무소식이 희소식이라는 주문을 외우며 가슴 한구석엔 눈길조차 주지 않는 것이 내 슬픔을 이기는 방법이다. 세상은 모든 것을 다 가질 수 없도록 하는 것이 완벽한 규칙인 것 같다. 강한 만족감은 나태함을 만들고 결국 병들것이다. 행복을 느끼는 것은 찰나이고, 고통은 지속되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 찰나를 위해서 끊임없이 고통을 없애려는 동력을 일으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기꺼이 행복하려고 한다. 내 인생의 행복 그래프를 그려보자면 순간순간 어려움과 고통이 존재하지만 전체적으로 우상향 하고 있는 그림이 그려진다. 나의 내면과 외면 모두 완전한 자유를 가질 수 있다는 것, 어떤 통제도 나만이 할 수 있는 것, 내 인생의 설계를 내 맘음대로 펼칠 수 있는 것 자체가 너무 소중하다. 남을 위한 희생은 아무런 가치가 없다. 나를 위해 살자. 그 선택의 끝에서 웃을 수 있도록 후회 없는 결과를 만들자. 내 선택의 색깔들로 내 인생의 도화지를 꾸며 나가는 것, 어떤 관계로부터 방해받지 않는 노력이 필요하다. 나를 아끼는 것. 나를 사랑하는 것부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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