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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피아윤 Sep 10. 2024

잇프피와 엔티제가 사는 법


세상의 모든 인간유형을 16가지로 축약하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되지만, 그래도, 그 16가지 가운데 굳이 어느 그룹에 해당되는지 구분 지어 놓은 것이 MBTI다. 이 MBTI를 나는 대학교 3학년 때 교육심리학 수업을 들으며 알게 되었고, 20년 뒤, 그것이 혈액형을 대체하는, 일반화의 오류를 범하면서까지 우리 삶 속에 자연스럽게 녹아 있는 것이 새삼 신기함과 동시에  4가지에서 16가지로 인간유형의 범주화가 세분화되었으니, 다음세대는 64가지로 넘어가려나? 하는 기대심도 생기게 되었다. 아무튼, 우리가 주관식 보다 객관식을 선호하듯, 일단 틀을 갖추어 놓은 상태에서 그 사람을 파악하면 설사 끼워 맞추기라 하더라도 이해가 되는 부분이 있기 때문에 결국, '이 사람은 이런 사람이구나'라고 단정 짓기보다는 '이런 성향에 속한 사람이니까 이렇게 행동할 수 있겠네.'라는  관계의 이해를 위한 도구로 사용됨이 바람직하기 않을까 생각해 본다. 


나와 나의 남편은 공통분모가 하나도 없는 ENTJ (엔티제)와 ISFP(잇프피)이다. 

모든 잇프피와 엔티제가 우리 같다고 할 수는 없지만, 이런 두 사람이 함께 가정을 꾸려나가는 데는 엔티제의 역할이 참 중요하다. 그 엔티제가 바로 나다. 잇프피인 남편은 자기중심적이다. 물론, 배려를 모른다거나 남을 신경 쓰지 않는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오히려 타인을 의식하는 것은 엔티제보다 더 강하다. 내가 말하는 자기중심적이라는 것은 어떤 일이나 목표에 큰 그림을 그리기보다는 내 개인의 행복, 즐거움이 우선순위가 된다는 것이다. 엔티제인 나는 어떤 일을 해야만 한다면 지금 힘들어도 그 일을 하고 나서 뿌듯함을 즐긴다면 , 잇프피인 남편은 어차피 할 거라도 지금 당장 해야 하는 일이 아니라면 지금 내 휴식을 위해서 잠시 미뤄둔다. 사실 이런 성향 때문에 크게 중요하지 않은 가정일의 대부분은 내가 할 수밖에 없다. 눈치는 빠른 사람이기 때문에 내가 할 거라는 것을 알기에 "여보, 우선 이리 와, 같이 쉬자!"라고 말하지만  내 성격상 눈에 보이는 일을 놔두고 쉬기란 어렵다. 머릿속에 할 일이 있는 상태에서의 휴식은 휴식이라 느끼기 힘들기 때문이다.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도 엔티제가 더 강하다. 잇프피인 남편은 본인이 할 수 있는 방법을 다 해보고 안되면 "어쩔 수 없지 뭐."하고 마음을 내려놓는다. 하지만 나는 그 문제를 어떻게든 해결하기 위한 방법을 찾아보고 결국 되는 방향으로 끝낸다. 그러면 우리 남편은 "그래.. 자기는 잘할 줄 알았어." 한다.  어쩌면 MBTI를 떠나서 살아온 환경이나 가치관의 차이에서 이런 행동양식이 다를 테다. 요즘 드는 생각은 완벽을 추구하는 나의 엔티제 성격이 그를 더 잇프피로 만드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남편과 재혼하고 같이 산 5년 동안 여러 굴곡들을 지나면서 어려운 해결의 중심에는 늘 내가 있었다. 물론 남편이 손 놓고 보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내가 주도하고  그가 할 수 있는 적절한 포지션을 제시하면 그는 그냥 그것을 했을 뿐이었다. 어떤 문제에 대한 책임은 부부가 같이 지는 것이 맞지만 나보다 덜 적극적인 그가 못마땅한 것 은 사실이었다. 그리고 몇 가지 작은 사업을 남편의 그릇을 키우기 위한 방편으로 내가 적극적으로 도와주었는데, 결국 그 조차도 그의 시험보다는 나의 경험이 되었다. 그리고 깨달았다. 본인의 동력으로 시작과 끝을 혼자서 다 해봐야지만 그 능력을 시험해 볼 수 있다는 것을. 


티브이를 잘 보지 않는 내가 요즘 즐겨보는 드라마가 생겼다. 장나라가 주인공인 [굿 파트너]라는 드라마인데, 그녀는 아주 잘 나가는 법무법인의 대표인 이혼전문 변호사이다. 그녀가 맡은 사건의 의뢰인은 두 쌍둥이를 키우는 엄마였다. 남편이 유튜버를 한다는 핑계로 늘 밖으로 도는 사람이었고 알코올 의존증이 너무 심해 술 없이는 못 사는 사람이었기에 음주운전 경력도 화려했다. 아이들을 낳고 단 한 번도 육아에 참여한 적 없었고, 에너지 넘치는 남자 쌍둥이를 키우는 것은 엄마였다. 그 엄마는 단 하루만이라도 이 아이들에게 벗어나고 싶다며 양육권을 남편에게 미루는 상황이었고, 결국 장나라는 이혼과 동시에 남편에게 양육권이 가도록 소송에서 이긴다. "자기밖에 모르는 개차반 같은 남편에게 아이를 양육하게 하는 것이 맞는 것인가?"라고 질문하는 후배변호사에게 "아빠 역할을 할 수 있도록 시간을 준 것이다"라고 이야기를 한다. 그 장면을 보면서 '아, 나는 내 남편에게 엔티제스러운 역할을 기대하면서도 그걸 할 기회를 준 적이 없구나!'라고 반성했다. 


사람은 누구나 양면성이 존재한다. 내가 아무리 엔티제라고 하더라도 잇프피 성향이 아예 없는 것이 아니듯,

우리 남편도 그럴 것이다. 내 입장에서 엔티제의 역할을 기대하는 것처럼, 남편 또한 나에게 잇프피 성향을 맞춰줬으면 할 것이다. 어제도 내가 우리 차 2대를 정리하고 (우리 집은 현재 캠핑전용차까지  3대이다..ㅠ.ㅠ) 전기차에다 차박 할 수 있도록 꾸며서 차 한 대를 줄이는 것이 어떨까?라고 말을 했고, 차에 대해서는 전문가급의 지식을 가지고 있는 그가 '어떤 차'를 제시했다. 언뜻 보기에 차가 디자인도 괜찮고 가격도 적당하길래 "괜찮네?" 했더니, 바로 차를 구경 가자고 했다. 저녁 먹고 소화도 시킬 겸 따라나선 자동차 대리점에서 계약까지 디렉트로 진행하는 그를 보면서 다시금 아.. 저 사람 잇프피 맞네..라고 재차 생각했다. 차량 할부금이며 나머지 계획은 이제 내가 세워야 한다. 사실 계약하고 있을 때 이미 내 머릿속에서는 계산이 끝났다. 보통 때 같으면 돌아오면서 내 계산된 계획들을 말을 했을 것이다. 하지만 꾹 참고 물어보았다. "여보, 어떻게 보자마자 계약을 해?" 하니, "계약하려고 간 건데?" 한다. 어처구니가 없었지만, 계획을 물어보니 " 오빠가 알아서 다 할게." 하는 것 아닌가. 한 달 월급이 빤한데, 뭘 어떻게 하려고 하는 건지 이야기를 해 주지 않는다. 꼬치꼬치 캐물으면 성질부터 낼 것이 뻔하기에, 내가 먼저 선수 쳤다. "여보, 창고 나가면 보증금 손대면 안 돼, 그리고 주식도 지금 못 팔아. 적금도 4년 남았어."라고 나름 유동할 수 있는 돈의 이동을 막았다. 그리고 아침까지도 어떤 계획을 공유하지 않았다. 차 2대 팔아봤자 새로 사는 차값의 반도 안될 텐데 답답하지만, 이번 기회로 그가 해결할 수 있는 기회를 주려고 한다. 이번만큼은 절대로 내가 적극적으로 나서지 말아야지 하고 마음을 다 잡아본다.


이 이야기는 절대적으로 엔티제인 나의 입장에서 쓴 글이다. 

아마 남편보고 글을 쓰라고 하면 전혀 다른 글이 될 것임을 나는 안다. (하지만 그가 절대 글을 쓸 리 없다는 것도 알고 있다.) 남편에 대한 험담을 종이 위에 하는 것 말고는 할 방법이 없기에 구구절절 적어본다. 그래도, 5년 정도 살아보니, 얼핏 보면 최악의 궁합 같지만 서로의 결핍을 보완하는 좋은 파트너가 될 수 있는 조합임에 틀림이 없다.  남편과 나를 보면서, 서로 같은 방향을 바라보고 그 과정 또한 같다면 완벽한 일치로 시너지가 날 것 같은데 그러지 못해 아쉬움이 많았다. 하지만 똑같지 않기에, 서로 다른 부분을 보게 되면서 성장하게 되는 부분도 분명히 있다.  목표중심인 엔티제가 잇프피인 남편과 살면서 느림의 미학을 배울 때가 많고 그게 요즘 내가 추구하는 현재에 만족하는, 나 자신이 행복하는 것에 우선순위를 두는 그런 삶이다. 남편이 나의 반만 닮았어도, 우린 벌써 더욱 목표에 가까워졌을 텐데..라는 마음을 참 내려놓기 힘들었다. 남편이 안 하니까 내가 2배 이상 해야지 마음먹으니 몸이 힘들고 스트레스가 더 심했다. '그 목표 또한 남편과 같이 세운 건데 왜 나만 급하지?' 하니까 억울함도 생겼었다. 목표를 대하는 자세 또한 다를 수밖에 없는데, 그 속도의 기준도 나였다는 것을 이제야 깨닫는다. 앞에서  끌고만 가는 것은 독재가가 하는 짓이라고 했다. 진정한 리더가 되는 것은 함께 할 수 있도록 이끄는 것. 그 과정에는 참고, 인내하고, 기다리고, 상대방의 마음을 헤아리는 것 등이 다 포함되어 있을 것이다. 진정한 리더십은 기업을 운영하는 기업가들에게만 필요한 것이 아니었다. 내가 가르치는 학생들과 목표를 함께 공유하고, 동기부여를 해서 좋은 결과를 만드는 건 이미 내가 잘하고 있는 일이었다. 그 대상이 남편으로 바꾸기면 하면 되는 것이었다. 

하지만, '남편이어서' 내가 굳이 하고 싶지 않은 마음이 컸었고, 사실 아직도 그렇다. 그래도, 가정이라는 배를 잘 끌고 가기 위해서는 각자의 포지셔닝을 잊지 말고, 물살을 잘 살피며 노 젓는 방법도 바꾸어야 한다. 한 사람이 방향을 잡으면 나머지 한 사람은 힘과 속도를 함께 받쳐주는 것, 그 과정 속에서 서로의 속도와 방향을 읽어주는 것 그런 것들이 쌓이고 쌓여 부부의 추억이 되고, 먼 훗날 잉꼬부부라는 호칭으로 불리게 될 것이다.

잇프피와 엔티제의 모험이 해피엔딩이 되길 바라며 글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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