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명의 개인이 한 국가의 이미지에 미치는 어마어마한 영향력이란
한달살기를 위해 스웨덴의 스톡홀름에서 라트비아의 리가로 넘어왔다.
왜 라트비아의 리가냐구? 우리의 다음 한달살기 목적지를 결정하는데 큰 이유는 없다ㅎㅎ 발트3국이라고 불리우는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에 대해서 아는것이 전혀 없었고, 북유럽에서 멀지 않으면서 물가는 더 저렴하고. 가장 결정적으로 (우리가 보통 다음 목적지를 결정하는 이유다..ㅋㅋ) 스톡홀름에서 직항 비행기편 옵션이 좋았다ㅋㅋ
스톡홀름에서 비행기로 한시간도 채 안걸려서 도착한 라트비아의 리가.
일단 비행기에서 보이는 라트비아의 첫인상은..
와.. 나무가 엄청 많다..!!ㅋㅋ
최근 우연히 내가 애청하는 다큐멘터리 [건축탐구 집]에서 라트비아에서 목조주택을 통째로 해외직구하신 분의 이야기를 봤었다. 2층짜리 80평형 목조주택을 배송료 빼고 1억정도에 해외직구 했다고 봤는데.. 이렇게 나무가 많으니.. 라트비아의 저렴한 목조주택 가격이 이해가 된다 ㅋㅋ
한달살기를 하는 우리는 짐이 많은편이다. 각자 기내용 캐리어 하나, 꽤나 큰 수화물 캐리어 하나씩. 4개의 캐리어를 끌고 다닌다.
짐을 찾아서 리가 공항에서 시내까지 가는 버스 22번을 탔다. 공항과 시내를 연결하는 버스인데, 아무리 찾아봐도 짐을 보관하는 공간이 없다. 우리 말고도 캐리어를 끌고 있는 사람들이 꽤 많이 공항에서 같이 버스를 탔다. 다들 버스 안을 이리저리 둘러보다 짐을 보관할 곳이 마땅치 않아서, 자리를 잡고, 짐을 다리 앞에다 두고, 그 짐을 두손으로 꼭 붙잡고 앉았다.
사람 2명에 캐리어가 4개인 우리는 버스 뒤쪽에 두개의 2인승 좌석이 마주보고 배치되어 있는 4인승 공간에 자리를 잡았다. 안쪽에 작은 캐리어를 넣고 우리가 바깥쪽에 앉아서 나머지 캐리어들을 손으로 꼭 붙잡고 버스가 출발했다.
시내쪽으로 가까워지자 평일 오전임에도 불구하고 버스는 꽤나 붐벼졌다.
시내까지 15분정도 남았을즈음, 한 정거장에서 아주 예쁘게 단장하신, 한눈에 들어오는 쨍-한 분홍색 재킷을 입고 있는 할머니가 버스에 타셨다. 나이는 60-70대 정도. 풀메이크업에 악세서리에 구두까지, 멋져 보이는 할머니셨다.
그런데 그 할머니는 버스를 타자마자 바로 내쪽으로 직진하더니 내 얼굴을 바라보며 "Stand! (일어나!)" 라고 말씀하신다. 나는 '아 내 안쪽 자리에 앉으려고 하시는구나'라고 생각하고, 바로 일어났다. 그리고, 할머니가 안쪽 자리로 들어가기를 기다리는데, 할머니는 내가 앉아 있던 자리를 바로 꿰차고 앉으시더니, 나를 거의 온몸으로 의자에 앉지 못하도록 바깥쪽으로 밀쳐낸다. 그리고 내 얼굴을 다시 바라보며 "Stand!!" "너는 서서 가!" 나한테는 이렇게 들렸다.
자, 이제 두개의 2인승 좌석이 마주보고 있는 4인승 좌석의 한쪽에는 그 할머니가, 그리고 그 반대쪽에는 방금 전까지 나와 마주보고 앉아있던 내 남자친구가 이제는 그 할머니와 얼굴을 마주하고 앉아있다. 그리고 그 옆으로 캐리어 2개를 움직이지 않게 꼭 붙잡고 달리는 버스에서 간신히 균형을 잡으며 내가 서있다. 그리고 그 할머니는 내가 앉아있던 자리에 앉아서 아무일도 없었다는 듯이 천연덕스럽게 스니커즈 초콜릿바를 먹고있다.
너무나도 짧은 시간안에 일어난 이 일의 전개에 대해서 나도 내 남자친구도 둘다 '음..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난거지?' 상황파악중이다.
내 마음속은 순식간에 복잡해졌다. 얼굴도 붉어진 것 같았다. 지금 이게 무슨상황이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아무도 나한테 이렇게 대놓고 일어나라고 하고 내 자리를 차지하고 앉았던 적은 없었다. 심지어 버스 안에 자리가 없었던 것도 아니다. 조금만 뒤쪽이나 앞쪽으로 이동하면 충분히 다른 자리가 있는데, 굳이 나를 콕 집어서 일어나라고 소리친 뒤, 내 자리를 꽤차고 앉으셨다.
나같으면 이렇게 짐이 많은 상황에서 자리를 잡고 앉아있는 사람들을 본다면 젊은 사람들이어도 이해해주며 다른 곳으로 가서 자리를 잡거나, 아니면 그나마 힘이 좋은 젊은 남자에게 자리를 비켜달라고 할 것 같은데.. 나와 마주보고 앉아있었던 남자친구가 아니고 왜 굳이 나에게...? 남자친구는 미국인이고 나는 동양인이어서? 라트비아어만 가능하다면 할머니에게 물어보고 싶었다. 왜 나였는지.
독일에서 2년, 미국에서 10년 살면서 인종차별 경험이 없었다고 늘 얘기하고 다녔던 나였다.
적어도 대놓고 인종차별을 당한 경험은 없었다. 은근히 몰래(?) 인종차별을 당했다고 생각할 수 있는 상황에서도 나는 항상 인종차별이 아닌 쪽의 해석을 선택해왔다.
그런데 이건.. 다른 쪽으로의 해석이 어렵다.. 그 많은 사람들 중에, 심지어 내 바로 앞에 앉아있던 남자친구가 아닌 나를 콕 집어서. 내가 동양인이어서? 아니면 내가 여자여서? 뭐 어떤 쪽이든. 기분이 좋지 않다.
자, 이 시점에 나는 라트비아에 도착한지 채 한시간도 되지 않았다^^
여기서 한달을 살 수 있을까? 나를 환영하지도 않는 이 나라에 나는 왜왔을까? 갑자기 너무 서럽고 이 핑크재킷 할머니 한 분 덕분에 나는 라트비아라는 나라 전체가 싫어졌다.
불과 한시간 전만 해도 발트 3국을 소련으로부터 독립하게 해주었던 너무나도 멋진 비폭력 시위 '발트의 길'에 대해서 읽으며 이번 한달은 어떨까 너무 설레고 기대하고 있었는데ㅠㅠ 이제는 그냥 빨리 라트비아를 떠나고 싶어졌다. 한사람이 나라 전체의 이미지에 끼칠 수 있는 이 어마어마한 영향력!!
그러나, 나 자신에게 다시 얘기한다. 한명으로 나라 전체를 일반화하면 안돼.. 여기에도 좋은 사람들이 많이 있을거야. 아직 라트비아에 대해서 판단하기에는 너무 일러!! 하.. 그래도 기분은 나쁘다...
시내에 도착해서 한달살기 숙소에 들어갈때까지 네시간 정도를 기다려야 했다.
한달살기를 일년반동안 하며 배운 아마도 가장 큰 꿀팁중의 하나는, 굉장히 많은 나라에 에어비앤비의 대안이 있다는 것이다. 완벽하게 관광객들을 타깃으로 숙소를 제공하는 에어비앤비는 그 나라의 물가에 맞지 않게 말도 안되는 높은 가격으로 한달살이 숙소를 제공하고 있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래서 우리는 가능하면 로컬들이 단/장기로 집을 임대하는 사이트에서 한달살이 숙소를 찾는 편이다. 이런 로컬 사이트에서 에어비앤비와는 비교도 안되는 좋은 가격으로 한달살이 숙소를 찾아왔다. 단점은? 에어비앤비같은 확정성(??)이 없다ㅋㅋ 미리 돈을 내는것도 아니고.. 문자로 이 집 한달살기 가능한가요?? 네 그럼 이때이때 들어갈게요..ㅎㅎ 실제로 집에 들어가서 주인을 만나고 눈으로 집을 확인하기까지 '이거 사기 아니야? 우리 이번달에 집 없는거 아니야??' 이런 걱정을 계속 하게된다.
이번달 역시 라트비아 로컬 사이트에서 정말 너무나도 말도 안되게 좋아보이는 숙소를 찾았다. 이 가격에 이렇게 아름다운 집에서 한달을 살 수 있다고?? 오후 3시 집주인과 약속시간에 맞춰 약속장소에서 기다리는데 30분이 지나도 집주인이 나타나지 않는다.. 하.. 이거 신종사기인가? 드디어 이번달에는 숙소가 없는건가??ㅋㅋ 별 걱정을 다 하며 그저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 드디어 나타난 집주인님!! 너무나도 귀여운 애기들 두명을 데리고 나타나셨다ㅎㅎ 오자마자 늦어서 너무너무 미안하다며..
집은 사진과 그대로였다. 아니, 사진보다 훨씬 더 좋았다. 7층 건물 꼭대기층 지붕의 모양을 그대로 살린 멋진 내부 구조에, 지붕의 각도 때문에 집 안 전체에 햇살이 따뜻하게 가득 들어오고 있었다. 심지어 지붕쪽 창문으로 기어나가면 라트비아 시내의 뷰를 바라보며 와인을 마실 수 있는 마법같은 작은 공간에, 라트비아의 추운 겨울을 말해주고 있는 벽난로까지 있었다.
혹시라도 신종 사기일까봐 우리는 아직 돈도 준비하지 않았는데, 우리의 친절한 집주인 아주머니는 우리에게 아무것도 받지 않고(!!) 집을 우리에게 주고 떠나셨다. 요리하는거 좋아하냐며 한달동안 쓸 수 있는 물건들 이것저것 챙겨서 저녁때 다시 온다고 그때 돈 주면 된다고 하신다.. 아무것도 안받고 그냥 간다고? 우리를 너무 믿는거 아닌가??
에어비앤비가 아니라 장/단기 숙소를 구하는 라트비아 사이트에서 찾은 집이었기 때문에, 당연히 에어비앤비같은 비품들 (수건, 침대커버, 조리도구, 식기, 샴푸, 비누 등등..)은 기대하지 않았다. 이런 비품들을 우리가 다 사서 한달동안 쓰고 버리고 가도 에어비앤비보다 저렴하기 때문에 상관 없었다. 집주인 아주머니에게 그저 가능하다면 후라이팬 하나에 냄비 하나만 가져다주세요.. 라고 부탁했다ㅎㅎ
그렇게 저녁이 되었고, 집주인 아주머니는 후라이팬 하나 냄비 하나보다 훨씬 더 많은 것들을 박스에 박스에 박스에... 가득 가득 싸서 다시 나타나셨다. 심지어 이 시점까지도 아직까지 우리에게 아무런 보증금도 받지 않으셨다..
"요리하는거 좋아한다고 했죠?" 후라이팬 하나 냄비 하나가 아니라 뭐 키친에이드 믹서기에 반죽기에 토스터기에 전기 주전자에.. 모든 식기와 각종 와인잔 그리고 칵테일 쉐이커까지.. 주방에서 필요한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을 박스에 박스에 다 들고 오셨다.. 소금, 설탕, 심지어 라바짜 커피 원두 홀빈 2kg까지.. 심지어 이 모든 주방용품들이 다 새거다.. 넉넉한 수건에, 침대커버에 이불에.. 샴푸에 헤어팩에 목욕용품에 바디스크럽에 최신형 다이슨 헤어 드라이어까지.. 우와.. 다이슨 드라이어도 새거다..!!
확실히 우리 한달 월세보다 이미 더 많은 돈을 쓰신 것 같은데ㅋㅋ 심지어 이 모든 물건들을 다 가지고 올때까지 아직 우리에게는 한푼도 받지 않으셨다니, 이게 말이 되나.. 한바탕 이사(?)가 끝나고 까먹고 그냥 가려고 하시는 걸 우리가 월세를 손에 들려서 보내드렸다ㅋㅋ
우리가 한달동안 편하게 지냈으면 좋겠다고ㅎㅎ 편하게 지내고 가라고, 이 모든 것들을 8월의 크리스마스마냥 선물을 펑펑 뿌리고 가주신 고마운 우리의 집주인 아주머니!! 여지껏 일년반동안 한달살기 하며 이렇게 편하게 집처럼 느껴졌던 곳은 없었다. 벌써 너무 편하고 행복하다. 진짜 좋은 한달이 될 것 같다.
자, 이 시점까지 아직 라트비아에 도착한지 채 하루도 지나지 않았다ㅋㅋ
핑크재킷 할머니와 우리 집주인 아주머니. 라트비아에 도착하자마자 만난 이 두명의 사람들은 이렇게 극과 극이었다. 나에게 최악의 하루와 최고의 하루를 선물해주신 이 두분들..ㅎㅎ 그래서, 오늘은 최악의 하루였을까, 최고의 하루였을까?
이렇게 라트비아의 첫날이 지나간다. 그리고 라트비아의 첫인상을 어떻게 결정해야 할지, 나는 아직도 감을 잡을수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