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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Y Mar 09. 2016

30살의 나

일상,사랑 그리고 미래


"언니가 뭐 꺼낸 줄 알아?"


  직장 동료이자 친구 같은 두 살 어린 지민이에게 남자친구가 생겼고, 며칠 후 그녀가 내게 소개팅을 해주겠다고 했다. 나는 으레 하는 말이겠거니 생각하곤 알겠다고 대답하고 무심코 넘겼는데 그녀는 진심이었고 또 어마어마한 추진력으로 이튿날 약속날짜를 잡았다.


  그 무렵의 난 다이어트를 한답시고 하루에 한 끼만 먹기(저녁식사만)를 해왔고, 소개팅이 있는 날은 여느 때보다 더더욱 아무 것도 먹지 않고 약속장소로 나갔다. 여태껏 살아오면서 소개팅은 딱 한 번 해봤었고 그렇게 남자를 만나는 자리도 오랜만이라 잔뜩 긴장했다.

  지민이가 긴장한 걸 눈치채곤 노는 자리로 생각하자며 편하게 마음먹으라고 했고 나는 알겠다고 대답했다. 그러나 그건 대답일 뿐이었다.


  약속시간이 되었다. 그녀가 "어? 저기 온다."라고 말하는 동시에, 횡단보도를 건너는 많은 사람들 사이로 돋보이는 남자 두 명을 포착했다. 곧 모델처럼 키 크고 준수한 외모의 그들이 다가왔고 우린 어색한 인사를 나눈 뒤 조명이 꽤 괜찮은 고깃집으로 들어갔다.


  나는 어색함을 없애려 술을 주거니 받거니 하며 홀짝 홀짝 마셔댔다. 주량이 세진 않지만 평소 마시는 양만큼 마셨고 이 정도는 괜찮겠지 싶었는데......  웬걸? 2차로 장소를 옮겼을 때 살짝 어지러움을 느꼈다. '화장실에 갔다오자.' 내가 화장실에 들른 사이 지민이와 남자친구가 자리를 비켜주었고, 나는 단둘이란 생각에 술은 더 이상 마시지 않고 이야기만 해야지,라며 다짐했는데......


  이미 알코올은 내 영과 육을 지배한 상태였다.


  나는 숨이 끊겼다가 다시 붙은 사람처럼 거칠게 호흡하며 눈을 떴다. 마치 순간이동이라도 한 듯 내 방 침대 위에 누워있었다. 내 영혼이 비명을 질러댔다. 악몽이길 바랐지만 아찔한 현실이었다. 바닥엔 어제 입은 옷과 가방이 너부러져있었다. 나는 가방 안을 살폈다. 안엔 파우더 폭탄을 맞아 엉망진창이었고, 쌩뚱맞게 캔커피도 들어있었다.


  나는 방문을 벌컥 열고 거실로 나갔다. 소파에 앉아있던 엄마가 한심하게 날 쳐다보더니 어제의 날 흉내 냈다. 그녀가 손을 엄지와 검지를 펼친 가위(가위바위보)모양으로 만들곤 양팔을 흔들면서 '뽀꼬!뽀꼬!'거렸다. 그러고는

  "니 어제 뽀꼬 뽀꼬 거리던데 그게 뭔 소리고?"

  나는 기가 막혀 실소를 터뜨리며 고개를 저었다.

  "내가 그랬다고? 몰라. 그게 뭔데?"

  그렇게 반문하는 순간 뭔지 알 것 같았다. 요새 영어공부 한답시고 미드랑 미국영화를 보는데, 가끔씩 들리는 영어욕(Fu**)을 따라한 적이 있었고 술에 취해 엄마에게 그 F욕을 한 것이었다.

  '세상에......' 기가 막혔다. 술 취하면 부모도 몰라본다더니 내가 그 짝일 줄은 더더욱 몰랐다.


  그 날 출근해서 지민이를 만났다. 날 바라보는 그녀의 눈빛이 예사롭지 않았다. 가까이 다가가자마자 '미안.'소리가 마치 신음소리처럼 튀어나왔다.

  "언니, 나중에 이야기 해."

  하루 종일 그 모든 일들이 신경쓰여 미쳐버릴 것 같았다. 퇴근길에 지민이가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날 바라보며 물었다.

  "언니, 언니 주사 뭔지 알아?"

  나는 몇 가지 생각나는 대로 이야기했지만, 그냥 모든 현실을 부정하고 싶어 말꼬리를 흐리며 고갤 저었다.

  "뜸 들이지 말고 빨리 말해봐. 내가 어떻게 했다던데?"

  그녀가 킬킬거리더니,

  "언니 처음엔 말도 제대로 하고 안 취한 것처럼 보였대. 그런데 화장실 간다는 사람이 호프집 주방으로 들어가더래. 남자가 그제야 언니가 취한 줄 알고 나가려고 했대. 그런데 언니가 막 계산한다면서 가방에 손을 집어넣더래. 근데 언니가 뭐 꺼낸 줄 알아?"

  나는 아무 생각이 없었다. 그냥 모든 게 거짓말이었으면 싶었다. 그녀가 웃음을 주체하지 못하면서 대답했다.

  "기름종이를 꺼냈대. 언니가 종업원한테 기름종이를 주면서 계산해달라고 했대."

  번뜩 기억의 조각들이 떠올랐다. 계산대에 있는 컴퓨터처럼 생긴 기계와 그 뒤에 선 아주 환하게 웃고 있는 여자의 얼굴 그리고 가방 안을 뒤적이는 내 손......


  그게 끝이 아니었다. 가방 속에 든 캔커피는 그 남자 사준 것이었는데 술이라도 깨우게 하려 캔커피를 사서 벤치에 앉혔는데 내가 그 벤치를 뛰어넘으려고 했다는 것이었다. 정말 쥐구멍이 아니라 쥐 똥구멍에라도 들어가 숨고 싶었다.


  집으로 돌아가 엄마에게 모든 이야기를 털어놨다. 그녀는 이야기가 끝나자마자 "와이고야! 남자가 니한테 식겁했겠네!"라고 놀려댔고, 이어 "니 술 그래 마시다가 큰일 난다! 술 적당히 마셔라!"라고 다그쳤다.

  내가 징징거리듯 말했다.

  "그게 술을 많이 마신게 아니라 내가 밥을 제대로 안 먹고 술을 마셔서 그렇게 된 거다."

  그 말을 한다고 달라질 건 없었지만 그렇게라도 변명을 해야 했다. 그 날 밤 지민이에게 문자했다. '진짜 꼭 미안하다고 전해줘.'

  그 일이 있은 후로 한 달 넘게 정말 술 근처엔 얼씬도 하지 않았다.


  그 기름종이를 다 쓰지 못해서 지금도 파우치에 넣어 다니지만 한 번씩 그걸 쓸 때마다 그 기억이 떠올라 전율한다.

  병신년엔 곱게 술 먹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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