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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쏘피쌤의 책장 Oct 02. 2023

완독의 반대말은?

당신이 영어책 읽지 못하는 이유

  

 머릿속에 벌레가 기어 다니는 거 같다. 자꾸 화가 치밀어 오른다. 30분 전 카페에 들어와 커피와 예쁜 케이크, 책을 나란히 세팅하고 독서 인증 사진을 찍을 때까지만 해도 기분이 좋았다. 긴 머리 늘어뜨리고 하얀 꽃을 귀에 꽂은 커버 속 여인은 참 예뻤다. 그런데 그녀가 나를 이렇게 힘들게 할 줄이야...


 영어 원서 읽는 북클럽을 이끈 지도 어느새 일 년이 지날 때 즈음이었다. 리더로서 그나마 하나 내세울 수 있는 건 클럽에서 읽는 모든 책을 다 완독하고 있다는 자부심이었다.


 표지가 유독 마음에 들었던 이 책이 나의 완독 챌린지 발목을 잡을 줄 몰랐다. 그동안도 마음에 안 들어서 억지로 읽은 책은 많았다. ‘까만 건 글씨요 하얀 건 종이요’과의 책을 읽을 때는 그야말로 읽는 척을 했지만 그래도 다 읽었다. 그런데 그 ‘억지로’가 쌓여서 탈이 났던 걸까? 책을 읽는 마음이 너무 힘들고 속이 뒤집어질 것 같았다. 맥락 없이 이 여자 저 여자랑 연애하고 다니는 남자 주인공 때문이었을까? 노벨 문학상까지 수상한 작가라는데 감히 책이 별로라고 비판하기도 쉽지 않았다. 책을 읽다 새까맣게 탄 속에 하얀 글씨들이 떠다녔다. 부글거리는 속 뚜껑을 닫아놓고 며칠을 꾸역꾸역 읽다 보니 이게 뭐 하는 짓인가 싶었다. 그래! 나는 ‘책을 읽지 않을 권리’를 행사하기로 했다. 그렇게 2주 동안 나를 괴롭혔던 ‘콜레라 시대의 사랑’을 덮었다. 리더라서 모든 책을 다 읽어야 한다는 내가 씌운 굴레를 벗어던지고 나니 홀가분하다 못해 통쾌했다.






 우리는 책을 왜 읽는 것일까? 즐기기 위해서지 남에게 보여주기 위해서는 아닐 것이다. 책은 끝까지 다 읽는 것만이 정답일까? 손에 집어든 모든 책을 다 좋아할 수 도, 좋아할  필요도 없다. 그렇다면 꼭 끝까지 읽을 필요도 없는 것이다. 그런데 유독 영어책 읽을 때는 읽다가 접는 마음이 찜찜하다. 마치 도전에 실패한 기분이 든다고 할까.


 10년이 넘게 영어 원서를 읽었다고 하면 흔히들 책을 술술 잘 읽을 거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글을 쓰는 지금도 알랭 드 보통의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 읽으면서 또다시 하양과 까만색만 있는 방에 갇힌 기분이다. ‘사랑’이라는 보편적 주제도 작가 특유의 철학적 관점을 만나서 그런지 어렵게 느껴진다. 심지어 몇 년 전에 번역서로도 읽었는데 왜 이렇게 해석이 잘 안 되는 걸까!


 헨리 데이비드 소로가 쓴 ‘월든’은 번역서로도 꽤 어렵다는 평이 자자했다. 그래도 책 좀 읽었다는 사람들 사이에서 최고로 일컬어지는 책이라 기대를 가지고 첫 장을 넘겼다. 100년도 훨씬 전에 써진 책이라 어휘부터가 만만치 않았다. 애시당초 원서로만 읽겠다는 객기는 내려놓고 번역서를 같이 집어 들었다. 한 챕터 한 챕터 원서와 번역서를 번갈아가면서 읽었다. 한 페이지가 통째로 해석이 안 될 때도 많았다. 원서는 그저 거들뿐 대부분의 이해는 한국어 번역서의 도움을 받았다. 하지만 ‘월든’을 읽는 내내 즐겁고 행복했다. 소로가 직접 쓴 문장을 눈으로 밟아 나간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만족스러웠다.






 어떤 원서가 잘 읽히고 안 읽히고의 기준은 꼭 영어 실력에만 있는 건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 책에 담긴 생각이 나를 얼마나 설득하고 움직이는지가 중요하다. 다시 말하면 내가 그 작가의 생각을 공감해야 한다. 무언가를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은 취향의 문제이기도 하다. 그래서 영어 책을 고르는 데 있어서 나의 취향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 초콜릿은 좋아하지만 민트 초콜릿은 싫어할 수 있는 것이다. 한국어 소설책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 영어 소설이 재미없는 것은 당연한 결과일 수 있다. 아무리 많은 사람들이 쉽고 재미있다고 추천하는 책도 내가 재미없으면 안 읽히게 마련이다. 영어 실력만 탓하기보다는 ‘이 책이 나랑 맞지 않는구나.’라고 생각해 보면 어떨까? 그래서 하얀 종이 위에 까만 꼬부랑글씨로 보이는 게 아닐까. 그렇다면 그 책은 내려놓고 다른 책을 들어보자.


모든 책을 끝까지 읽어야 한다는 완독 콤플렉스를 내려놓으면 더 많은 영어책을 즐길 수 있는 여유가 생길 것이다. 완독의 반대말은 책을 끝까지 다 읽지 않는 것이 아니라 책을 아예 집어 들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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