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에게 영어는?
영어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대부분 표정은 한결같다. 오랫동안 짝사랑하다 포기한 사람의 표정이랄까. 말로는 끝났다고 하지만 눈에는 아쉬움이 가득하다. 마음을 열 것 같이 굴다가 끝내 오리발 내민 매정한 녀석 같으니라고. 영어 잘하고 싶은데 안 돼서 속상한 이야기는 밤을 새워도 모자라다. 중학교 시절부터 성인이 된 이후까지 들인 시간만 10년은 족히 넘는다. 각자 퍼부은 돈 얘기는 하지 말기로 하자. 서로 구차해지니까. 왜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영어에서 실연의 아픔을 겪는 걸까?
누구나 삶에서 생생하게 기억에 남는 기분 좋은 순간들이 있다. 내게는 그런 기억 중 하나가 수영을 배우며 처음 오리발 꼈을 때이다. 25M 레인을 두 번 만 왕복해도 숨이 턱 끝까지 차곤 했다. 그런데 ‘오리발’이라는 신무기를 장착하고 나니 그야말로 나는 무적이 되었다. 마치 마법에 걸린 듯 힘 안 들이고 앞으로 쭉쭉 나갔다. 툭하면 숨을 헐떡거리며 벽에 붙어있던 나약한 찌질이는 온데간데없었다. 인어공주가 춤을 추듯 우아하게 물에서 놀고 있었다. 오리발만 있으면 하루 종일이라도 수영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오리발 끼고 수영하는 날이 매일 기다려졌다.
내가 영어를 처음 제대로 말해 본 건 스물아홉 살 때였다. 그전까지 영어 공부를 안 했다고는 할 수없지만, 가끔 회화 책을 읽거나 EBS 영어 방송을 흘려듣는 정도였다. 영어를 말로 써먹어야겠다는 의욕은 크게 없었다. 소심한 인풋을 쌓아나가던 중 집 근처 동사무소에서 원어민 회화 강좌가 열렸다는 공고를 보았다. 일단 집에서 가깝고 수업료도 저렴해서 가벼운 마음으로 도전할 수 있었다. 혼자서만 연습해 오던 영어를 처음 밖으로 꺼내본 것이다. 지금 생각해 보면 쉬운 단어를 문법에 맞게 나열하는 정도의 실력이었다. 하지만 파란 눈의 선생님은 내 이야기를 알아들어 주었다.
‘오! 마이 갓!’ 내가 영어로 말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 신기하고 기분이 좋아 웃음이 실실 새어 나왔다. 몇 번의 어설펐던 대화였지만, 그 경험은 회화 연습을 제대로 해보고 싶은 동기를 주기 충분했다. 영어를 제대로 배워보고 싶어졌다. 한국 방송통신대학교 영어영문학과 3학년에 편입했다. 하지만 영문학 책에는 당장 쓸수 있는 회화 문장들은 찾기 힘들었다. 그래서 당시 즐겨 듣던 EBS 방송 교재 속 영어 대화를 통째로 외우기 시작했다. 수업 주제와 조금만 맞으면 외운 문장을 내뱉어 봤다. 3년 동안 꾸준히 영어 방송을 들으면서 다양한 상황 속 어휘와 표현들을 내 안에 쌓아나갔다. 무턱대고 외우기만 했던 문장이 쌓여서 하고 싶은 말을 영어로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었다. 그렇게 갈고닦은 영어는 어느새 나의 오리발이 되어가고 있었다.
영어를 말할 수 있다는 자신감은 강력한 아이템이 되었다. 소심함으로는 어느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았던 내가 혼자서 해외여행도 다니기 시작했다. 어쩌다 만난 외국 친구 앞에서 주저 없이 영어를 내뱉었다. 또 다른 세상의 문이 열린 것이었다. 더 견고한 아이템이 갖고 싶어졌다. 표현, 발음, 제스처 그리고 문화까지.
넘치는 의욕으로 어학연수를 떠났다. 하지만 영국에서 만난 점잖은 신사 숙녀의 발음은 차라리 독일어에 가깝게 들렸다. 분명히 동사무소에서 만났던 원어민 선생님은 내 이야기를 쏙쏙 알아들었는데.. 왜 런던 맥도널드 점원은 ‘영수증’ 달라는 말을 세 번째 말해줘도 못 알아들은 걸까. 실전에서 부닥치며 만난 영어는 내가 알았던 것과는 또 달랐다. 모든 것이 리셋되었다. 다시 자신감은 제로가 되었다. 6개월 동안 오전에는 학원에서 수업을 듣고 오후에는 봉사나 무료 회화 강좌등 영어로 말할 수 있는 기회를 찾아다녔다. 하지만 단기 연수로 갑자기 영어 실력이 눈에 뛰게 업그레이드되는 건 아니었다.
한국으로 돌아와 주말 영어회화 동아리에 나가기 시작했다. 다양한 주제를 이야기하고 있지만 늘 비슷한 표현과 단순한 문장만 입에서 맴돌고 있었다. 유명하다는 회화 책을 봐도 재미가 없었다. 답답함과 간절함 사이에서 고민할 때 전에 잠시 시도하다 접었던 영어원서 읽기가 떠올랐다. 동아리에서 만난 몇몇과 영어 책 읽는 모임을 시작했다. 모임의 첫 원서는 당시 영화로도 개봉되었던 엘리자베스 길버트의 ‘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라’ [Eat, Pray, Love]이었다. 영어 책을 읽고 있다는 신기함에 신이 났다. 몇 년 새 영어 실력이 갑자기 늘어서라기보다 나와 나잇대와 고민이 비슷했던 주인공의 이야기에 크게 공감이 갔었다. 스토리에 빠져 어느새 책 한 권을 다 읽었다. 처음 회화연습을 시작할 때 느꼈던 열정이 되살아났다. 성취감과 즐거움을 동시에 주는 원서는 나의 선생님이자 친구가 되었다. 재미없게 느껴지는 회화 연습은 내려놓고 영어로 쓰인 책을 읽기 시작했다. 매달 한 권 이상 1년 정도 원서를 읽다 보니 자신감이 차오르고 영어로 말을 하고 싶어졌다. 다시 전에 다니던 회화 모임의 문을 두드렸다. 이번엔 리더로 참여하면서 적극적으로 말하기 연습을 했다. 모임 내 스터디를 이끌면서 기초 문법을 가르치는 봉사도 했다. 성인들을 가르치기 위해서 문법책 한 권을 꼼꼼히 보면서 회화에 필요한 문법을 정리했다. 그렇게 1년 더 연습을 하니 전보다 더 다채롭고 세련된 영어 문장을 구사할 수 있게 되었다.
읽기, 말하기, 듣기, 쓰기 각 영역을 옮겨 다니며 영어 연습한 시간이 10년이 넘었다. 한 영역에 막혀서 부딪히면 흥미를 찾아 과감히 다른 영역으로 넘어갔다. 말하기가 안 돼서 읽기로 옮겨 간 그때 원서는 나에게 정답지가 없는 영어 문제집 같았다. 채점을 하지 않아도 되니 그저 재미있게 연습할 수 있었던 것이다. 꾸준히 연습할 수 있는 원동력은 결국 흥미이기 때문이다.
길거리 한복판에서 헤매고 있는 외국인을 도울 수 있는 뿌듯함, 자유롭게 혼자서도 해외여행을 갈 수 있게 된 용기, 자막 없이 미드를 보는 여유, 영어 덕분에 삶이 다채로워졌다. 지금 나는 영어라는 오리발을 끼고 드넓은 바다에서 유영하고 있다.
당신에게는 영어가 어떤 오리발인가요? 아무리 연습을 해도 보상이 없는 오리발인가요? 또는 삶을 업그레이드 해준 오리발인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