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영어 귀가 뚫린 사연
나이키 창업자 필 나이트의 자서전, ‘슈독’은 그가 처음 회사를 만들어가는 과정이 생생하고 흥미롭게 그려졌다. 세련된 블랙 커버에 빨간 나이키 마크가 보기만 해도 기분 좋아지는 책이었다. 나같이 표지보고 책을 고르는 사람에게 유혹적이었다. 스토리도 중반까지 긴박감 있는 전개가 이어져 책을 내려놓을 수 없었다. 전 세계에 자신이 만든 브랜드를 히트시킨 그의 기발함과 열정은 책에도 잘 녹아있었다. 그런데 문제는 책이 너무 길었다. 전체 400페이지, 중반 이후부터 늘어지는 전개가 지치기 딱 좋았다. 그동안 읽은 게 아까워서라도 완독 도장을 받고 싶은데 며칠째 같은 페이지에서 맴돌고 있었다. 방법을 찾아야 했다.
오디오북을 한번 들어볼까? 사실 그동안 주변에서 오디오북 들으면서 영어책 읽는 사람들을 본 적 있었다. 하지만 독서는 종이 위 글자를 눈으로 읽는 것이라는 고정관념이 강했던 때라 직접 들어본 적은 없었다. 두꺼운 책을 펼쳐놓고 답답한 마음에 한번 시도해 보기로 했다. 유튜브 검색 창에 ‘Shoe Dog Audiobook' 치니 영상이 몇 개 보였다. 귀로는 소리를 들으면서 눈으로 글자를 따라가니 책장이 넘어가기 시작했다. 오디오북과 함께 지루했던 부분을 지나다 보니 다시 재미가 느껴졌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내가 들은 오디오북은 전문 내레이터가 읽어 준 게 아니라 기계가 읽어주는 TTS버전이었다. 어쩐지 어색한 톤이 마치 로보트 같더라니.
오디오북의 손을 잡고 높은 벽돌 책 산을 넘은 경험은 나의 원서 읽기 여정에 흥미로운 전환점이 되었다. 그때 이후로 전에 읽다 포기했던 두껍고 어려운 책을 과감하게 집어들 수 있었다. 믿는 구석이 있었기 때문이다. 유튜브에는 무료로 영어책 읽어주는 영상 찾기가 쉬웠다. 이어폰으로는 오디오북을 들으면서 책을 읽는 게 습관이 되었다. 영어책 읽을 때 모르는 단어를 많이 찾지 않고 흐름을 따라가기 좋아했던 나에게는 오디오북과 함께 읽는 게 딱 맞아떨어졌다.
오디오북은 나에게 마치 마라톤의 페이스메이커 같은 존재가 되었다. 책을 읽다 지쳐서 터벅터벅 걷고 있으면 내 손을 살포시 잡고 같이 뛰어주었다. 친구와 함께 달리니 외롭지 않았고 힘이 덜 들었다. 한 달에 한 권 겨우 읽던 원서를 어느새 두세 권씩 마구 읽어 대고 있었다.
오디오북에 관심을 갖고 보니 전문 성우가 읽어주는 유료 오디오북 사이트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아마존이 운영하는 오더블에서 첫 달은 무료로 들을 수 있다는 달콤한 유혹에 얼른 지갑에서 신용카드를 꺼내 들었다. 첫 달은 무료지만 신용카드는 등록해야 했다. 그래 이 바닥이 다 그렇지 뭐. 핸드폰 캘린더에 한 달 전 구독 취소 알람을 맞추고 나름 방어전을 펼쳤다. 그때 처음 들었던 오디오북이 유발 하라리가 쓴 ‘21세기의 제언’ 원서였다. 전에 하라리의 벽돌 책 세트 ‘사피엔스’, ‘호모 데우스’를 읽었다. 그때 난이도와 두께에 넉 다운돼서 읽을 엄두를 더 이상 못 내고 있던 책이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오디오북 손을 잡고 읽었더니 술술 잘 넘어갔다. 오디오북은 진짜 멋진 친구였다.
그 이후로 나는 거의 대부분 원서를 오디오북과 함께 듣고 있다. 토익 듣기 495점 만점에 480점 정도 나왔지만, 실제 영어 듣기는 그리 훌륭하지 않았다. 영어 뉴스는커녕 드라마나 원어민의 대화가 잘 이해되지 않아서 감으로 때려잡기 일쑤였다. 그런데 오디오북을 꾸준히 듣기 시작하고 6개월 정도 지났을 때였다. ‘태어난 게 범죄’의 작가가 트레버 노아가 직접 읽어주는 오디오북이 마침 유튜브에 무료로 떠 있는 게 아닌가. ‘아싸!’를 외치면서 책을 펼쳤다. 며칠뒤 침대에 엎드려 오디오북과 함께 책을 읽다가 고개가 아파서 잠시 누워 눈을 감고 듣고 있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어느새 깔깔거리고 웃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했다. 코미디언이기도 한 트레버 노아의 유머가 자연스럽게 이해되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야말로 귀가 뻥 뚫린 순간이었다. 확신에 찬 손가락은 오디오북 정기구독 버튼을 눌렀다. 한 권에 2만 원이라는 돈이 전혀 아깝지 않았다. 한 달 동안 원어민 친구의 달콤한 목소리를 듣는 대가치고 오히려 감사한 가격이었다.
아침마다 책상에 앉아 영어책을 읽느라 미루었던 산책을 다시 시작했다. 이어폰에서는 '파친코'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History has failed us, but no matter.’ (역사는 우리를 저버렸지만, 그래도 우리는 상관없다.) 팔에 소름이 돋는 건 새벽 공기가 차가워서만은 아니었으리라. 나는 오디오북을 들으며 온전히 책 속으로 빠져들게 된 것이었다. 선자의 독백을 듣고 있자니 눈물이 흘렀다. 인적이 드문 새벽이라 그 눈물을 훔치는 손이 부끄럽지 않았다. 스토리도 아름답고 영어를 알아듣게 된 나도 아름답게 느껴지는 아침이었다.
원서 북클럽을 이끌다 보면 종종 듣는 질문이 있다. ‘영어원서 읽으면 영어실력이 향상되나요?’ 그럼 나는 대답한다. 어떤 목적으로 어떻게 읽느냐에 따라 다르다고. 오랫동안 원서를 읽어본 경험상 그냥 책만 읽는다고 자연스럽게 모든 영역의 영어 실력이 향상된다고 느끼지 못했다. 듣기, 말하기, 쓰기, 읽기 각각의 실력 향상을 위한 세분화되고 전략적인 노력이 필요한 것이다. 그중에서 듣기 실력 향상을 목적으로 한다면 나는 영어 오디오북 듣기를 강력 추천하고 싶다. 성향 상 오디오북 듣기가 힘든 경우를 제외한다면 수준에 따라 기초에서는 발음 학습이 가능하고 중급 이상인 경우는 영어 청취 스킬 향상도 기대할 수 있다. 마지막 단계인 고급 수준으로 가서는 그야말로 오디오 북을 들으면서 이야기 속 세상을 여행할 수 있는 멋진 경험을 할 수 있다. 2년 넘게 꾸준히 오디오북을 들은 현재 나는 웬만한 원어민의 이야기는 속 시원하게 알아들을 수 있는 듣기 실력을 가지게 되었다. 내 친구 오디오북 덕분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