똑똑, 그녀의 집 문이 굳게 닫혀있다. Knock! Knock! 이번엔 그녀가 우리 집 문을 두드린다. 나도 아직 문을 열지 못했다.
딸깍, 드디어 그 문이 열렸다. 내가 그녀의 세계로, 그녀가 나의 세상으로 들어온다. 우리는 한참 알았던 친구보다 더 정답고 애틋하다. 뉴욕을 떠나 이탈리아, 인도, 인도네시아까지 그녀의 여행 이야기를 듣고 있노라니 나는 어느새 가본 적 없는 발리 해변에 앉아있다.
엘리자베스 길버트의 에세이 '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라', [Eat, Pray, Love]를 30대에 한번, 40대에 한번, 두 번 읽었다. 주인공 리즈는 겉보기에는 안정되고 화려한 삶을 살고 있다. 하지만 실상은 결혼생활과 스스로에 대한 회의감이 깊어져 우울증에 시달리기까지 한다. 결국 모든 것을 두고, 떠나보기로 결심한다. 그렇게 1년 동안 세계 여러 나라를 여행하며 진정한 자아를 찾아간다는 줄거리다. 30대 때는 내가 가진 고민을 나눠주는 그녀에게 공감이 느껴져 열렬히 응원했다. 낯선 곳으로 떠나 나를 찾는 여행이 간절했던 때였다. 하지만 현실은 그리 녹녹지 않으니 대리일탈에 만족해야 했다. 10년이 훌쩍 지나 다시 만난 친구는 전과는 달리 보였다. 조금은 철이 없어 보이기도 했던 걸 보면 나도 어느새 꼰대가 되어 있었나 보다.
오랫동안 영어책을 읽으며 많은 친구들을 만나 위로를 주고받았다. 책이라는 걸 제대로 읽기 시작한 게 서른이 넘어서다. 그전에는 사실 책 읽는데 관심이 없었다. 십 대와 이십 대를 채워준 영화는 많이 있었지만 딱히 인상에 남는 책은 없었다. 어릴 적 집에 있던 책이라곤 빛바래고 두꺼운 고전 몇 권이 다였다. 아마 20대에 읽은 책이 전공서 빼고 스무 권은 됐을까. 그만큼 책과는 거리가 먼 편에 서있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런 독서 문외한에게 처음 책 읽는 재미를 느끼게 해 준 건 우리말 책이 아닌 영어책이었다.
‘행복한 이기주의자’, [Your Erroneous Zone]과의 만남은 우연이라기에는 너무 필연 같았다. 이 책은 먼저 번역서로 읽었다. 워낙 독서를 안 하던 나였기에 책을 통해 감동을 받은 건 신기한 경험이었다. 그래서 무작정 작가의 실제 목소리가 듣고 싶어 원서를 구매했다. 당시 영어 독해 실력이 뛰어나지는 않았지만 그나마 다행이었던 건 원서 읽기를 공부가 아닌 그냥 책 읽기로 바라보는 여유가 있었다. 번역서를 옆에 두고 막히는 부분은 바로바로 찾아보면서 한 권을 읽었다. 사실 끝까지 읽었는지 기억도 가물가물하다.
그런데 그때 '나도 원서를 읽을 수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그동안의 막연함이 ‘도전’이라는 단어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자신감을 얻었던 것이다. 그 이후로 10년 넘게 지금까지 계속 원서 읽기를 꾸준히 해오고 있다.
원서를 읽는 가장 큰 이유는 영어를 써먹는 성취감이 독서의 즐거움을 훨씬 더 크게 만들어주기 때문이다. 그 느낌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혼자서 처음 두 발자전거를 탔을 때, 운전면허를 딴 후 첫 드라이브를 나갔을 때, 3년 적금이 만기가 돼서 처음으로 해외여행을 떠날 때 느꼈던 희열을 기억한다면 공감이 될 것이다. 학창 시절에 배웠던 단어들로 외국에서 현지인과 소통이 됐을 때 기쁨은 지금도 생생하다.
모국어가 아닌 외국어로 만나는 이야기 속 화자는 단순히 종이 위 글씨가 아니다. 그들의 메시지를 의식적으로 번역하다 보면 직접 소통하는 느낌이 든다. 그래서 논픽션이던 소설이던 책 속에서 친구를 만나게 된다. 영어는 어린아이도 할아버지도 다 You, 그렇게 모두가 평등한 언어이니. 영어를 말할 때는 내가 다른 사람이 되는 게 느껴진다. 더욱 자유롭고 대범해진다고 할까. 책에서 만난 친구들에게도 격의 없이 성큼성큼 다가간다.
내 인생 최고의 책을 꼽자면 '밀레니엄: 여자를 증오한 남자들' [The Girl With The Dragon Tattoo]이다. 각각 700페이지가 넘는 세 권의 시리즈를 한 달 동안 밤을 새우며 읽었다. 살면서 그렇게 푹 빠져서 책을 읽었던 적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잔인한 스릴러 영화는 질색하는 내가 주인공 리스베트의 복수에 열광적으로 환호했다. 가냘프고 힘없는 여자지만 자신을 짓밟고 능멸했던 남자들을 처절하게 응징했던 용문신을 한 소녀 리스베트! 지금도 그녀가 가끔씩 보고 싶다.
'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라', [Eat, Pray, Love]에서 이탈리아를 여행하며 발음이 예쁘다는 이유로 주인공 리즈가 자주 말했던 단어 ‘Attraversiamo'. 영어로는 'Let’s cross over', '함께 건너가자’는 의미이다. 그녀가 열심히 되뇌던 말을 지금 당신에게 건네고 싶다. "함께 건너가자!" 영어책을 읽으며 저 너머로 건너가 또 다른 친구들을 만나자! Attraversiam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