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년 환갑 우리 아빠를 위한 퍼스널 브랜딩
우리 아버지는 내가 스무 살 때부터 십 년 넘게 은퇴하면~ 귀농하면~이라는 말을 입에 달고 지내셨다. "곶감마을 호랭이할배"이라는 이름도 그 무렵 같이 지었다.
아버지의 고향 마을에서는 집집마다 감나무를 키운다. 가을이면 주렁주렁 열매가 달리고 겨우내 대롱대롱 말려서 곶감을 만들기도 한다. 우리 아버지는 호랑이 해에 태어나셨는데, 동갑내기 고향 친구들과 같이 농장을 꾸리실 거란다. 호랑이와 곶감의 조합은 전래동화를 연상케 한다. 귀농하실 때쯤엔 할배시려니, 하고 지은 이름인데 멀게만 느껴졌던 아버지의 귀향이 어느덧 가까이 다가왔다.
건설업계에 계신 아버지는 3D 도면 작업에도 능숙하시고 나에게 엑셀과 파워포인트를 과외해주실 만큼 MS Office 도 잘 다루신다. 주말마다 내려가서 농산물 창고를 뚝딱뚝딱 지으시더니 명함을 파야겠다며 이런저런 그래픽을 만들어 보내주셨다. 능숙한 프로들과 작업을 해본 내 눈에는 영 성에 차지 않았다. 애쓰셨다는 공허한 격려를 몇 번 해드리다가 우리 회사 브랜딩을 도와주신 아보카도에 정식으로 의뢰하게 되었다.
소상공인을 위한 합리적인 패키지에는 다섯 명의 디자이너분이 참여해주셨다. 아버지는 처음에는 이렇게까지 할 것 있냐며 딸들이 적당히 만들어달라고 하셨다. 그러다 막상 첫 번째 설문을 제출한 뒤로는 갑자기 클라이언트 모드로 돌변하셨다.
아마 카톡 채널에서 여러 가지 피드백을 쏟아내신 모양이다. 말로는 잘 표현하셔도 텍스트는 약하신데 아마도 틀린 맞춤법과 방언이 넘실거리는 톡을 보실 담당자분이 조금 걱정이었다. 그래도 난생처음 하는 브랜딩인데 온전한 경험을 해보시길 바라며 최대한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어가게 하고 가족들은 뒤에서 응원했다.
매 라운드마다 우리 삼 남매와 부모님이 모여있는 가족 카톡방에 올라온 시안을 같이 보면서 디자인과 색상을 두고 투표도 하고 의견도 나누며 즐거운 토론이 이어졌다. 최종 결정된 디자인은 바로 트랙터를 탄 호랑이. 호랑이 얼굴이 아버지 실제 얼굴이랑 너무 닮았다며 다들 재밌어했다. 동글동글 바퀴와 호랭이라는 둥근 글씨도 참 어울린다.
멋진 디자인에 신이 나신 아버지는 두 살, 다섯 살 조카들을 위한 스티커 굿즈 제작에 돌입하셨다. 곧 내려가시면 멋진 간판도 세우고 패키지 디자인도 하실 거란다. 나중에는 이장 선거에도 나가실 거라는데, 이대로라면 선거용 명함과 포스터도 만들어 보자고 하실 기세다. 서울에서 만든 세련된 디자인이 상주 청리면에서도 생동감 있게 공간을 채우고 사람들을 연결할 거라 생각하니 설렌다.
부모세대의 퍼스널 브랜딩을 도와드리니 MZ 세대스러운 효도를 한 것 같아서 뿌듯하다. 모쪼록 조만간 건강하고 활기차게 귀향생활을 하셨으면 좋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