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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손경희 Mar 26. 2022

나의 열다섯

힘들었던 기억, 다들 하나쯤 있잖아요

질풍노도의 중학교 2학년. 나에게도 변곡점이었다.


중학생이 될 무렵 아버지의 사업이 부도났다. 자녀들은 모르길 바라셨지만 첫째 딸이 독촉 전화를 받았다. 비밀을 지키던 언니는 예정대로 사립 기숙학교로 떠났다. 내가 중2를 앞두고 슬슬 진로에 관심을 갖자 엄마가 따로 부르셨다. 학비가 낮은 국공립이 좋겠다고. 담담하게 현실을 이야기하는 엄마를 마주했을 때, 훌쩍 어른이 된 기분이었다.


엄마는 학교 앞 분식집을 하겠다고 하셨다. 나는 도울 일은 없냐며 어른스럽게 굴었다. 막상 뜨거운 기름 앞 엄마가 "아줌마 피카추 한 개 빨리!"라는 예의 없는 말을 들으니 속상했다. 엄마는 우아하고 합리적인 분이었다. 가령 유치원을 고를 때 놀이터가 큰 A와 미술수업이 많은 B를 비교하며 선택권을 주는 식이었다. 그렇게 점잖고 다정한 엄마가 돈을 벌기 위해 과격한 일상을 견디고 있었다.


열다섯 또래들은 스티커 사진을 찍고 노래방에 갔다가 캔모아 빙수를 먹곤 했다. 내 용돈으로는 역시 무리였다. 핑계 대며 빠지다 보니 급식 먹는 무리에서 소외되기 시작했다. 대놓고 배척하지는 않았다. 끼기 어려운 대화를 이어가며 자기들끼리 눈을 마주칠 뿐. 핸드폰이 없는 내 앞에서 문자로 얘기해줄게, 라며 비밀이 늘어갈 뿐. 쉬는 시간 10분이 왜 그리 긴지 화장실을 다녀와도 남는 시간이 괴로웠다. 한 아이는 내 운동화를 보고 그 이상한 브랜드는 뭐냐며 무안을 주었다. 뭐긴, 시장에서 흥정해 몇 천 원 깎은 신발이지. 시비 거는 이의 다리 사이를 잠자코 지나갔다는 옛 현자를 생각하며 애써 무시했다.


소외를 견디려 도망친 곳은 도서실. 사서 선생님과 눈이 마주치면 안도감이 찾아왔다. 홀로 찾아오는 마음을 아셨는지 펄벅의 장편소설을 추천해주셨다. 들고만 있어도 지성이 넘쳐 보이는 두툼한 양장본. 활자가 작아 꾸역꾸역 넘기기도 했지만 완독 하니 독해에 자신이 붙었다. 김영사에서 나온 "물리가 물렁물렁"을 비롯해 '앗! 이렇게 재밌는 과학이' 시리즈를 연달아 읽었다. 책 속의 거대한 세상을 만나면 눈앞의 문제가 작아 보였다.


여름방학 즈음 엄마는 열 살짜리 동생이 눈에 밟힌다며 가게를 정리하셨다. 나는 혹시 학교를 벗어날 수 있을까 기대하며 고등학교 원서를 내봤다. 불합격이었지만 2학년이 면접까지 본 게 주변에 알려졌다. 수능 과탐 선생님께서 연락을 주셔서 나 하나를 앉혀놓고 수업 리허설을 해주셨다. 마음껏 질문하며 물리와 화학을 배웠다. 수강료 대신 전단지 모델을 해달라셨다. 두고두고 감사한 일이다.


겨울에는 친구 따라 상담을 갔다가 혼자 용인에서 서울로 수학학원을 다니게 되었다. 제일 재밌었던 건 기하학. 국제대회에 입상한 서울대 대학원생 분이 강사로 오셨다. 나중에 알았지만 엄마는 2003년에 당시 월 100만 원이 훌쩍 넘던 학원비를 감당하려고 산후조리원 청소를 하셨다. 고졸 가정주부의 최선이었다. 학원에는 부모님이 학계나 의료계에 계신 친구가 많았다. 다들 서브웨이를 사 올 때 나는 주로 삼각김밥을 먹었는데, 자긴 배부르다며 슬쩍 챙겨주는 친구도 있었다. 부는 상대적이고 궁핍은 주관적이다. 어쨌든 수도권에 사는 덕에 버스와 지하철로 학원에 갈 수 있었고 대중교통이 끊긴 밤에 수업을 마치면 차로 데리러 와주셨다.


우여곡절 열다섯을 지나 고등학생이 되었다. 첫 물리 수업의 주제는 scientific method. 과학이란 무엇인지에 대한 질문으로 시작했다. 눈앞에서 강의를 하시는 분은 도서실로 도망쳐 읽은 앗! 시리즈 중 "번쩍번쩍 빛 실험실"이라는 책의 저자인 교수님이셨다. 자연과학을 사랑하는 스승은 눈에 보이지 않는 또 다른 세계를 열어주셨다.


하나의 문이 닫히면 또 다른 문들이 열린다. 왜 이렇게 꼬이나 싶어도 다른 길을 찾다 보면 마치 기다렸다는 듯 도움의 손길이 있었다. 멈추어 슬퍼만 했다면 몰랐을 소중한 기회와 인연이 계속 나타난다. 모든 일들이 다 지나간다는 건 참 아쉽고도 다행스러운 일이다.


서른이 넘은 지금도 여전히 열리지 않는 문이 계속 나타난다. 잠시 문 너머를 가늠해보고 다시 움직인다. 더 많이 두드리면 더 많이 열릴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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