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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용과 부작용

멈출 때 일어나는 일들

by 소피

그제는 한숨도 잠을 못 잤다. 30대가 되고서는 신나게 놀면서도 밤을 꼴딱 새우는 일은 없었다. 피곤하지도 않게 하룻밤이 멀쩡히 지났다. 다음 저녁에야 까무룩 잠든 모양이다. 내가 여기에서 잤나? 싶은 곳에서 눈을 떴다.


의사 선생님은 2주에 한 번 만나는데 그 사이 궁금한 게 많다. 그럴 때는 GPT에게 상태를 읊는다. 최근 복용한 약물의 용량과 시기, 감각과 감정을 뱉는다. 대개 AI는 그럴듯한 설명을 하고, 정확한 건 의료진과 상담하라고 선을 긋는다. 사실 뭐라고 답변이 오든 큰 상관은 없다. 어차피 처방받은 약을 꼬박꼬박 먹을 테니. 그저 나 자신에게 일어나는 변화들을 스스로 인지하고 싶다. 멋대로인 몸에 대한 주인의식을 견고히 하고 싶은 거다. 말이 되는 것 같은 논리적인 듯한 설명을 뱉어주니 역시 그렇지? 하고 스스로를 이해하는 기분을 느끼는 거다. 그래, 약을 두 알에서 한 알로 줄여서 그래. 상태가 좋아졌잖아. 약을 멈춰서 그래. 단약의 부작용 중에 하나라잖아. 정상이야. 지금 2주가 지났고 낮에는 친구와 너무 신나게 놀았고 한밤에는 스트레스받는 전화를 받았지. 그래서 그래. 괜찮을 거야. 결국 좋아질 거야.


약을 네 알씩 먹으면서도 일상이 버거운 시기가 있었다. 하루는 남편과 식사 준비를 하는데, 눈앞에 있는 채소의 이름이 떠오르지 않았다. 이거... 이거... 네 글자인데... 이거.... 손가락으로 그 푸른 채소를 찌르며 "자기야 이거... 이거... 넣어줘요"라고 자신 없게 말했다. "브로콜리?" 그는 단박에 정확한 단어를 찾아내어 콕 집었다. 나는 문득 그 원활한 신경계의 인지능력에 질투가 났다. 나도 알아, 나도 안다고. 눈으로 빛이 들어가면 시신경을 통해 뇌 뒤쪽이 자극되고 그게 언어를 관장하는 ㅂㄹㅋ 어쩌고를 지나서 단어를 찾고 입술과 혀 근육을 움직인 거잖아. 나도 다 아는 거야, 아는 거라고.


주변에 얘기하면 나만 진지했다. 당연히 사람이 가끔 그럴 때도 있는 거 아니야? 그치. 맞아. 누구나 종종 그렇지. 근데 이건 확실히 평소와는 달랐다. 평소에는 생각나지 않는 말도 실루엣을 더듬거릴 수 있었다. 리을, 키읔, 이런 자음이나 모음들을 뒤적거리면서 골목을 달리는 기분. 뾰족하지는 않지만 희미한 말과 소리의 느낌을 가지고 돌아다니는 느낌. 그런데 이번에는 확실히 달랐다. 깊이를 알 수 없는 심연의 블루홀에 빠져서 모든 인지능력이 통제된 숨 막히는 순간을 느꼈다.


큰 재앙에는 늘 전조 증상이 있다지. 과연 며칠 뒤에 곤경에 빠졌다. 현관 앞에서 비밀번호가 생각이 나지 않았다. 다행히 남편이 안에 있었고 오류 횟수를 초과해서 시끄러운 알람이 울렸다. 아휴 지금 뭐해요, 귀찮아하며 문을 열어줬다. 비밀번호가 생각이 안 났다는 말을 꺼내기가 싫었다. 곧 생각이 날 텐데 뭘. 현실을 외면했다. 그리고 그 다음날 집 앞. 다시 브로콜리 블루홀에 빠졌다. 나말고 이 집 비밀번호를 아는 유일한 사람, 남편. 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코 앞에 있는 남편에게 전화를 걸었다.


현관 비밀번호가 기억이 안 나요.


다 멈춰야겠어.

일단 나는 퇴사할 수 없는 회사를 두고 휴가를 떠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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