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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과 관성

숨은 나를 비추는 기록이라는 거울

by 소피

이게 맞나? 처음 의심을 하게 된 건 매일의 기록 덕분이다. 재택근무를 하는 회사에서는 매일 15분씩 서로의 안부를 묻고 짧게 기록했다. 아침 운동이 뿌듯해서, 날씨가 흐려서, 저녁에 반가운 얼굴을 보기로 해서. 하루하루 조금씩 다른 서로의 기분을 묻고 듣는다. 진행 담당이 발언권을 주고 기록 담당이 메모도 한다.


아무래도 여러 사람이 모이는 자리다 보니 약간은 텐션을 끌어올리게 된다. 자, 사람들이 모두 모였어!라는 상황이 인지되면 인사이드아웃의 조이가 제일 먼저 툭 튀어나온다. 안녕 여러분~ 오늘도 반가워~ 다 같이 힘을 내보자~ 하고 사회적이고 밝은 모습을 꺼내고 싶다. 투덜이, 잠깐 들어가, 15분만 좀 참으라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상이 버겁다 싶으면, 오늘은 좀 피곤해요, 하고 약간 용기를 내는 식이다.


11월의 어느 날. 잠을 잘 못 잤어요. 이걸 굳이 기록까지 하나 싶은 작은 근황이 엑셀 시트 한 칸을 채웠다. 너무 사소한 데에 시간을 쓰나, 싶은 적도 있었지만 그동안 매일 적은 게 왠지 아까워 몇 년째 계속 이어진 루틴이다. 그러고 보니 요즘 꽤 잠을 설친 것 같았다. 특별한 계기가 될만한 게 있었나. 그런 거라면 아마 기록도 있을 텐데 싶어 타임라인을 뒤적였다. 오른쪽 가운데 손가락으로 마우스 휠을 드드륵, 드르륵. 참 손쉽게도 시간을 거스른다.


최근의 일이라고만 여긴 '잠'의 문제. 가을에도 발견되었다. 어, 여름에도 그랬네. 그전에도, 또 그전에도.. 아예 키보드에서 컨트롤 키와 에프키를 눌러 "잠"을 검색한다. '잠을 잘 못 잤어요'가 처음 등장한 건 1월. 확실히 점점 그 빈도가 늘고 있었다. 혼자 보는 일기가 아니라 아주 솔직한 민낯까지는 아니다. 그럼에도 꽤나 유의미한 데이터가 쌓였다. 잠이 계속 문제긴 하구나. 차츰 잘 자서 기분이 좋아요! 도 등장. 늘 하던 대로 평소의 근황을 이야기하는데 점점 잠이 중요한 요소가 되면서 그 비중이 커지고 있었다.


아무래도 데이터가 더 필요하다 싶어 수면장애를 검색했다. 신경과에서 하는 "수면 다원 검사"라는 게 있단다. 다원은 여러 가지 원인, 멀티소스라는 뜻. 잠을 자는 동안 문제가 될 만한 모든 문제를 한꺼번에 검사를 하는 거다. 병원에서 하룻밤을 잔다니 신기하네. 호텔처럼 깨끗하고 예쁜 침실이 있는, 굿슬립신경과. 이름부터 아주 믿음직스러운 병원에 전화를 걸어 예약을 했다. 요새 잠을 깊이 못 자는 것 같아요. 오늘은 병원에서 자고 올게요, 남편과 인사를 나눴다.


나란히 두 개의 검사실이 있었다. 남녀 임상병리사 선생님 두 분이 하루씩 번갈아가며 같은 성별의 환자들과 밤을 새우는 구조라고 알려주셨다. 마지막으로 화장실을 다녀왔다. 팔과 다리에 온갖 센서가 주렁주렁. 숨 쉬는 걸 봐야 해서 코에도 뭘 끼우고, 뇌파를 재야 해서 머리에 찐득한 젤을 바르고 전극도 잔뜩 붙였다. 최대한 평소처럼 지내고 비슷한 시간에 잠들어보세요,라고 하셨는데 이게 말이 되나 싶을 정도로 불편했다. 머리맡의 CCTV가 밤새 잠자는 나를 찍을 건데, 잠이 잘도 오겠어요. 트루먼쇼도 아니고.


혹시 몰라 가져간 노트북을 꺼내지 않기로 결심하고 나니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9시 넘어 어디 연락올 곳도 없고.. 불을 끄고 누웠는데 방이 참 깜깜했다. 에이 그래도 이런 상황에 잠이 잘 오겠어? 다들 잠을 잘 수 있기는 할까? 공기청정기에서 나는 작은 바람소리.. 섬세하게 꾸며주셨네... 침구가 뽀송해... 기분이 좋다.... 걱정이 무색하게 금세 잠들었다.


잠깐만요, 밝은 빛에 눈이 부셨다. 나를 깨운 선생님은 전극을 다시 붙여주고 나가셨다. 아니 나 지금 실험 중인데 이렇게 깨우시면 제대로 뭐가 안 나오는 거 아닌가.. 싶었지만 계속 잠을 잤다. 다음날 아침. 임상병리사 선생님의 방으로 가니 데이터를 간단하게 브리핑해 주셨다.


CCTV에 기록된 지난밤은 가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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