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부터 생경한 수면 다원 검사. 수많은 센서들이 나의 하룻밤을 기록했다. CCTV 속 흐릿한 검은 화면 속에 희끄무레한 형체가 보였다. 갑자기 허공에 오른쪽 다리를 올리더니 왼쪽으로 휙 넘겨서 몸이 돌아간다.
며칠 후 나이가 지긋하신 의사 선생님을 다시 만났다. 진단명은 주기성사지운동장애. Periodic Leg Movement Disorder. 주기적으로 팔이나 다리를 움직인다는 것. 영상으로 보이지 않는 다리 움직임은 그래프를 보여주셨다. 지진계처럼 진동이 기록되는데 한두 시간마다 크게 요동치는 지점이 보였다. 이것 때문에 잠을 잘 못 잤구나. 결과지에는 스트레스가 만성이니 정신과 검사도 받아보라는 소견이 있었다. 신경과에서 처방해 주신 약을 먹으니 며칠 꽤 잘 잤다. 원래 파킨슨 환자분들이 드시는 약. 저용량으로는 다른 질환에도 쓰인다고. 집 근처에 신경과를 찾아봤는데 없었다. 병원에 가긴 해야 하는데.. 미루고 미루다가 계절이 넘어갔다.
그 사이 안 좋은 습관이 생겼다. 밤만 되면 생크림와플이 너무 먹고 싶었다. 떡볶이, 피자.. 인생에 달콤함이 부족했던 걸까. 맵고 짜고 달콤한 음식들을 찾았다. 10시, 11시. 자려고 누워서 고민을 하다가 결국 배달을 시킨다. 허겁지겁 배를 불리고 나서야 오늘치의 행복이 차오른 것 같아 약간의 뿌듯함과 죄책감을 함께 느끼며 잠을 잤다.
그러던 어느 날 디아블로 4라는 신작 게임이 나왔다. 남편과 PC방에 갔다. 둘이 같이 게임을 한 게 얼마만인지. 학생 시절에는 가끔 모든 일상을 딱 끊어내고 하루 이틀정도는 게임에만 몰두했다. 즉각적인 성취감을 느끼고 싶을 때. 사람이 어떤 노력을 했을 때 거의 바로 즉각적인 보상을 체감할 수 있는 건 요리와 게임 정도가 아닐까. 요즘에는 PC 방에 맛있는 음식도 많았다. 컴퓨터 앞에서 끼니를 때워가며 게임을 플레이했다.
디아블로에서는 수도 없이 많은 적군이 우글거리는 소굴에 들어가 죽이고 죽이고 죽이는 게 일이었다. 나는 체력이 아주 좋고 건장한 남성 캐릭터를 골랐다. 웬만한 공격에는 끄떡없이 튼튼하다. 나는 온몸을 던져 적진에 용맹하게 뛰어든다. 신나게 칼춤을 추면 몬스터들이 나에게 몰린다. 내가 시선을 끄는 사이 남편은 푱푱 후방지원을 한다. 체력이 아주 낮아 몸을 사려야 하는 남편은 꽤나 강력한 공격을 한 발 한 발 조준해서 쏘아준다. 그렇게 둘은 던전을 돌며 수많은 적을 해치우며 전리품을 나누며 기뻐했다. 아주 어려운 보스는 여러 번 실패한 끝에 어렵게 처치해 감격스럽기까지 했다. 역시 우리는 최고의 콤비야. 액션 RPG를 이렇게 제대로 즐긴 것은 처음이다. 내가 엄청나게 강해진 세계에서 양손에 도끼와 검을 들고 신나게 휘두르면 머리에 찐득하게 붙어있던 현실의 문제와 잡념이 사라지는 듯했다.
그렇게 신나는 주말을 보낸 다음날. 헬스장에서 운동을 하는데 몸에서 이상한 상처가 발견되었다. 사진을 찍어 AI에게 보내서 물었다. 이거 뭐지? 수포 같은데요. 얼른 병원에 가보세요. 대상포진일 수 있어요. 30대에 무슨 대상포진이에요. 사실 회사를 하면서 일과 삶의 경계가 갈수록 모호해졌다. 퇴근 후 창업 교육을 받으러 다니고. 사석에서 만나는 사람들도 사업가의 비중이 계속 늘었다. 이런저런 시장과 사업모델을 수시로 접하고 인간의 동기부여와 조직에 대해서 끊임없이 얘기를 나눈다. 사실 퇴근이 없었다. 법인장이 아니라 그냥 개인으로의 순수한 욕구를 채우는 순간이 얼마나 있었을까. 그동안 잠을 설치고 야식을 먹고 고자극의 디지털 콘텐츠 샤워를 하고. 스스로를 제대로 돌보지 않은 죄로 강제로 일상에서 로그아웃했다.
대상포진은 아팠다. 덕분에 많이 잤다. 주사치료를 받고 나면 지쳐서. 약을 먹으면 졸려서. 그동안 빌린 대출을 갚는 것처럼 몰아서 잤다. 일이 많고 바쁘다고 생각했는데 또 그렇지도 않았다. 한 주가 지나니 나에게 연락이 오지 않는 상태를 만들 수 있었다. 대상포진 치료가 끝나고 다시 수면 장애를 마주했다. 신경과에 다시 가야 하나. 집 바로 앞에 꾸준히 다닐 수 있는 정신건강의학과를 찾았다. 제발 잠 좀 자게 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