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교에 입학하면서 내가 가장 먼저 한 일은 내 방 벽지를 뜯어내는 것이었다.
내 방엔 유난히 낙서가 많았다. 집에서 거의 유일하게 낙서가 있는 방. 여자애라고 가장 안쪽 방을 배정받았는데, 이전 살던 사람들이 아이 방으로 썼던 모양인지 벽마다 알록달록 낙서가 잔뜩 있었다. 아이가 크레파스로 그린 희한한 무늬들. 그렇다고 결코 정감이 간다거나 사랑스러워 보이지 않는 무늬들. 나는 잠에 들 때맏 달빛에 어렴풋이 보이는 이 무늬들과 눈싸움을 하곤 했다.
대학에 들어가면서 벽지를 찢은 건, 나 스스로 자유로운 상태가 되었다고 여겼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자유롭고 내 결정에 책임을 질 수 있으니 내 방 벽지쯤이야 마음대로 해도 좋다고 생각한 것이다. 엄마와 아빠는 벽 한 면이 통째로 드러난 시멘트 벽을 보며 경악했지만, 등짝 때리기나 험한 말은 하지 않았다. “얘 방 얼른 새로 도배를 해줘야겠네요.” 엄마가 아빠에게 말하며 방문을 닫았고, 난 그길로 그동안 모아왔던 영화 포스터와 각종 엽서들을 시멘트 벽에 덕지덕지 붙이기 시작했다. 지금까지도 그 벽은 새로 도배되지 않았다.
샬럿 길먼의 <누런 벽지>를 읽은 건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창비세계문학 단편선 <필경사 바틀비>에서 이 소설을 골라 읽은 적이 있고, 무척 재미있는 작품이라 작가는 몰라도 제목마늠은 기억해두고 있었다. 그러나 몇 해 전 모녀 서사와 관련한 여러 텍스트를 공부하면서 <엄마 실격>이라는 책을 만났고, 그 책의 목차에서 <누런 벽지>를 발견했다. 반가웠고, 그제야 지난날 벽지를 찢어버리고 차가운 시멘트 벽에 등을 기대기도 포스터를 바꿔 붙이기도 했던 기억과 이 소설을 연결 지어 생각하게 됐다. 분명 주인공과 나의 처지는 달랐고, 그 부분을 정확히 짚고 넘어가는 일이 내게도 중요했지만, 벽지를 찢는 행위가 갖는 물리적 성질만큼은 어딘지 유사하게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