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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피스트 Apr 30. 2017

배고픔을 극복하기 위한 '행동지침'

돈 없다고 마냥 굶을 수만은 없는 노릇이니까.

 우리의 배고픔은 새로운 자취방에서 극치를 달리게 된다. 당시 나름 고수입 알바도 많이 했지만 개인적인 공부에 그 이상의 돈을 쓰게 되어 살림에 필요한 자금이 부족해졌기 때문이다. 4학년이 되면서 나는 입시학원에서 중학생을 상대로 시간제 강의를 하게 되었다. 시간당 3만원을 받는 고수입이었다. 수업은 일주일에 4시간을 하였다. 그리고 개인적으로는 졸업 설계를 준비하느라 집에 있는 컴퓨터를 학교 설계실에 가져다 놓고 숙식을 하게 되었다. 졸업 설계 중간중간 공모전을 몇 차례 준비하였는데 이 공모전이 사실 돈이 좀 들어가는 작업이다. 학원에서 월급을 받기 꼭 1주일 전이면 수중에 돈이 떨어지고 자취방에는 쌀이 떨어졌다. 물론 반찬은 말할 것도 없었다. 


공모전 준비로 학교에서 3~4일 지내고 며칠 만에 자취방에 들어갔던 어느 날이었다. 집에 컴퓨터 없이 혼자 지낼 동생이 걱정되고 쌀이 아마 떨어졌을 것 같은 생각 때문이다. 저녁 즈음에 자취방에 들어가 문을 열었다. 방안은 어두웠다. 그러나 밖에 신발을 보니 동생이 있는 듯하였다. 방 중간에 동생이 앉아있는 것이 희미하게 보였다. 어두운 방에서 동생의 희번뜩한 눈만 보였다. 동생은 혼자서 밥을 먹고 있었다... 아니.. 감자를 삶아먹고 있었다. 


쌀이 떨어진 지 며칠이나 되었던 것이다. 그 모습을 보고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나는 최소한 학교에서 지내면서 굶지는 않았는데 이 놈은 굶고 있었던 것이다. 가슴을 치며 스스로를 탓하며 동생에게 소홀했던 마음을 채근하였다. 다음날 학우들에게 몇 만 원을 빌려 먹거리를 샀다. (현재 힘든 나날 속에서 나를 지탱해주는 것은 그때의 그 동생의 모습이다.) 실컷 동생이 먹도록 두었다. 다시는 가족들을 굶게 하지 않으리라 다짐했었다.


알바 월급날. 학원 강의를 끝내고 돌아오는 밤에는 늘 햄버거를 두 개를 샀다. 월 1회 우리가 취했던 사치였다. 그리고 그 밤에는 포식을 한다. 그날 받은 월급으로 중국집에 전화를 걸어 탕수육에 짜장, 짬뽕을 시켜먹는다. 이것 또한 매달 실시했던 우리의 추억이다. 그리고 다음날은 동생과 인근 마트를 가서 식량을 산다. 쌀을 20kg를 사고 기타 부식거리를 산다. 양파, 오이, 호박, 어묵, 달걀, 무 그리고 빨간 소시지.. 이것으로 근 한 달을 버틴다.(사실 한 달이 채 가기 전에 이 부식들을 동이 났다.)


동생과 나는 이러한 배고픈 상황에 대비하기 위해 취했던 여러 가지 행동방식이 있었다. 자취가 끝나는 순간까지 이 행동방식들은 지켜졌고 발전되어져 갔다. 총 4가지의 방식을 소개해 본다.


1. 학생회와 친분을 유지한다.

 학생회에서는 다양한 행사를 한다. 물론 본인은 그것을 주도하던 학생회장이었다. 학생회에서 실시하는 행사 중 대다수는 먹을 것과 연결이 되어 있다. MT, 체육대회, 학생 주점 등등.. 이런 행사들에는 반드시 엄청난 양의 음식들이 수반되기 마련이고 특별한 경우가 아니하고서는 음식은 반드시 남는다. 이 음식을 수거해야 한다. 나 또한 MT 후 남은 음식재료들(3분 요리, 라면, 쌀, 밀가루)을 내가 다 가져왔다. 행사 후 이것들을 가져가는 사람은 거의 없다. 보통 학생회실에서 썩어가거나 버린다. 그러나 이것들은 내가 자취하면서 우리의 끼니를 해결하는 요긴한 방안이 되었다. 또 한 번은 과 동문회가 열렸다. 교수님들을 모시고 사회 각계각층에 포진된 선배들을 모신 동문회였다. 높으신 양반들이 참석하기 때문에 행사도 호텔에서 열렸고 호텔 뷔페를 먹게 되었다. 난 학생회장 자격으로 참석하게 되었는데 오랜만에 맛 본 기름지고 달콤한 음식에 배가 터지도록 먹었다. 어느 정도 배가 차고 나니 집에서 혼자 김치에 밥을 먹고 있을 동생이 생각이 났다. 그래서 과 조교선생님께 살짝 여쭈었다.

"선생님~ 이거 음식 많이 남았는데 좀 싸가도 돼요?"

"그래 자취생이 많이 먹어야지.."


선생님은 아무 생각 없이 말했겠지만 난 일종의 면죄부로 생각하고 일단 행사를 하면서 버려진 비닐봉지 대여섯 개를 주었다. 그리고 접시에 담긴 음식을 봉지에 담기 시작했다. 봉지가 꽉 차면 내 자리 밑에 내려놓고 다시 음식을 가져와 다른 비닐봉지에 담았다. 나중에는 급한 나머지 접시까지 담기 시작했다. 뷔페에는 호텔 관리요원들이 돌아다니고 있는데 이들의 눈을 피해 담기가 여간 까다로운 게 아니었다. 봉지가 다 차자 들고 가는 게 문제였다. 호텔 구석구석을 뒤진 덕에 종이백을 구할 수 있었고 나의 음식들은 무사히 자취방으로 갈 수 있었다. 쪽팔리다고 생각하지 마라 먹고사는 게 우선이다. 그 산해진미들을 자취방에 가져가자 동생이 제일 좋아했다. 그것을 며칠간 맛있게 먹는 동생을 보자 나도 기분이 좋아졌다. 다만 오랜만에 기름진 음식을 먹으니 설사가 수반되었지만 별로 중요한 문제는 아니었다.


2. 먹을 수 있을 때 먹는다.

 나중에 막내동생까지 자취에 합류한 뒤의 일이지만 역시나 그날도 내 월급날이었다. 언제나처럼 짜장면과 탕수육을 시켜서 먹으려고 했는데 아마 그날이 중국집들이 다 배달이 안 되는 상황이었다. 그렇지만 짜장면을 안 먹을 수는 없어서 짜파게티를 사 먹기로 했다. 알다시피 짜파게티는 그 양이 얼마 되지 않는다. 더구나 그 당시 내 동생들과 나의 식사량은 상상을 초월했다. 언제 굶을지 알 수 없었기에 음식이 생기면 우리는 바닥까지 싹싹 긁어먹는 게 생활화되어 있다. 생각해보니 3명이서 짜장면과 탕수육을 먹으면 1만원 이상이 들어간다. 그러나 짜파게티는 엄청난 양을 사 먹을 수 있었다. 그래서 그날 밤 우리는 10 봉지 이상을 샀었다. 막상 사놓고 끓이려고 보니 10 봉지 이상을 끓일 수 있는 냄비가 없었다. 낭패였다. 처음에는 3봉씩 4번을 나누어 끓여볼까도 했지만 우연하게도 우리의 눈에 들어온 게 있었다.

...... 물통.......


수돗물을 바로 마실수는 없기에 우리는 커다란 물통에 물을 끓이고 보리차를 넣어 식수로 사용했었다. 그 물통이 눈에 들어온 것이다. 물통에 담긴 물을 다른 냄비에 부어놓고 거기에 짜파게티를 몽땅 넣고 끓였다. 비주얼은 좀 그렇지만 배가 터지게 먹을 수 있었다.

먹을 수 있을 때 먹어야 한다. 지금 안 먹었다간 내일은 굶을 수 있다.

<당시 짜장면을 끓였던 거대한 물통>


3. 요리 재료는 맛이나 영양보다는 양으로 선택한다.

우리는 집에서 요리를 해 먹었기 때문에 음식재료를 사야만 한다. 물론 집에서 가져온 먹어도 먹어도 줄지 않는 마른반찬을 제외하고는... 음식재료를 살 때 중요한 것은 얼마나 많은 양을 만들어 낼 수 있느냐이다. 추천하고 싶은 재료는 '무'이다. 무는 튼실한 것이 700원~1000원 안팎이다. 이 무를 가지고 국도 끓일 수 있고 채를 썰어서 버무려 먹을 수도 있다. 무 채를 썰면 그 양이 어마어마하다. 하나 잘 사놓으면 1주일도 거뜬히 먹는다. 그다음 재료는 계란이다. 물론 계란은 프라이로도 먹긴 하지만 그러면 너무 아깝기 때문에 계란국으로 끓이면 계란 하나 가지고 한 끼 국을 해결할 수 있다 계란국에 들어가는 재료는 오로지 물, 계란, 소금, 파, 후추이다. 의외로 맛있다. 


4. 주인집과 친분을 유지하라.

주인장을 잘 만나면 음식이 공짜로 생기기도 한다. 물론 절대 공짜는 없다 볼 때마다 친절한 인사는 물론이고 가끔 마당 청소도 해야 하고 심부름도 해야 하고 어렵고 힘쓰는 일을 도와야 한다. 동생들이 이것을 참 잘했다. 그래서 김치는 늘 얻어오곤 했다.


이런 방식으로 부족한 식사를 보충했고 돈을 아꼈다. 

다시는 경험하고 싶지 않은 일이지만 가끔 삶이 힘들고 고달플 때 이때 기억이 날 버티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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