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대 티 내지 마라
몇 년 전 nn번째 직장에서 만나 친해진 동생 S는 나와 다르게 서비스 마인드가 장착된 친절의 대명사이다.
S는 근 일 년 만에 집 근처 직장에 취직을 했다. 오랜만에 들어간 직장에서 긴장감을 감추기 위해 평소보다 더 활짝 웃는 얼굴로 장착했다.
몇 달 후, 역시나 S의 웃는 얼굴은 어느새 썩은 미소가 되어 있었다. 좀 잠잠하다 했더니 어느 날 카톡이 왔다.
언니 잘 지내?
오랜만! 나야 뭐 똑같지. 아직 다니고 있어?
응. 오늘 관둔다 말하려고.
왜?
팀장 때문에. 나 들어오고 한 달 뒤에 왔는데 처음부터 ㅆㄱㅈ였어. 도저히 못하겠어. 처음부터 내 직속이 아니었는데 자꾸 날 부려먹어. 대놓고 무시해.
S의 말에 의하면 새로 들어온 여자 팀장이 자기를 하대하고 관련 경력이 없다며 대놓고 무시한다고 했다. 그동안 집 계약 때문에 참고 버텨왔는데 더는 참을 수가 없는지 이미 마음을 굳힌 듯했다.
나는 그녀의 성품을 알았기에 얼마나 상처받았는지 대충 짐작이 갔다.
카톡으로만 말하기엔 한계가 있기에 "너무 힘들면 억지로 참지 말고 맘 가는 대로 하라"는 뻔한 위로를 하고 저녁에 통화를 했다.
수화기 너머 들려오는 S의 울분에 찬 목소리는 그동안 현실적인 문제 때문에 당장 자리를 박차고 나오지 못해서 얼마나 자존심이 상했는지 짐작케 했다. 잠자코 듣고 있던 나는 좀 진정이 된 듯해서 질문을 던졌다.
S야. 왜 모든 사람이랑 다 잘 지내려고 하니? 그럴 수 없다는 걸 너도 알잖아.
알지. 근데 왜 나를 미워하는 건지 불편해서 견딜 수가 없어. 내가 잘못한 게 없는데도 그 어색한 상황이 싫어서 자꾸 내가 뭔가 더 하게 돼.
원래 뭔가 더 노력하고 시간과 정성을 쏟은 쪽이 항상 '을'이 되게 되어 있어.
신경을 썼다는 건 그만큼 바라는 게 있다는 뜻이나 마찬가지야.
S는 음악을 전공해서 그런지 나이답지 않게 순수하고 착하다. 모든 사람과 잘 지내려고 하고, 늘 친절하다. 가식적인 태도가 아니라 천성이 그렇다. 늘 삐딱한 태도로 모든 상황을 꼬아서 보는 나와는 정반대다. 극과 극이라서 통하는 면이 있다.
모든 사람에게 잘 지내려고 하는 태도나 맘에 안 들면 칼같이 단절하는 나나 모두 관계에서 상처받지 않으려는 일종의 방어기제다. S와 나의 차이라면 나는 이제는 모든 사람과 잘 지내고 싶지도 않을뿐더러 인간관계라는 건 내가 '노오력(!)'한다고 해서 뜻대로 되는 게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는 거다.
힘들어하는 S에게 공감과 위로는 30% 정도만 하고, 70%는 쓴소리만 늘어놓았다. 내 말을 오해하지 않을 거라는 걸 알기에 할 수 있는 최고의 솔직한 말을 했다.
S야. 네가 모든 사람과 잘 지내고 싶은 건
모든 사람이 너를 좋아해 줬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있는 게 아닌지 잘 살펴봐.
그런 거 같기도 해. 모르겠어. 대학교 때만 해도 모든 사람과 진짜 다 잘 지냈거든. 근데 회사 생활은 너무 어려워.
그렇게 남의 시선을 신경 쓰느라 모든 에너지가 밖으로 쏠려 있잖아? 그러니까 집에 오면 에너지가 방전돼서 아무것도 못하지. 너한테 좀 더 집중하도록 해봐.
중요하지 않은 것에 에너지를 쏟기엔 체력도 별로 없잖아.
S는 내 말을 머리로는 이해한 듯하면서도 그게 잘 안돼서 힘들다고 했다. 맞다. 잘 안된다. 천성이 그런 걸 어쩔 수 없지. 문제는 지금 회사를 관둔다 해도 제2, 제3의 빌런은 에너지 총량의 법칙처럼 어딜 가나 있다는 거다.
머리로는 이해하지만 막상 그 상황이 되면 또 잘 안된다는 S에게 특단의 처방을 내렸다.
S야. 그럼 이것 하나만 명심해. 만약 너를 싫어하는 사람이 있으면 억지로 잘 지내려고 애쓰지 말고 업무와 관련된 얘기만 해. 억지로 친해지려고 이것저것 사담을 늘어놓지 말고.
알겠어. 그건 할 수 있을 거 같아. 이제 잘 웃지도 않을 거야. 아예 말을 안 할래.
그게 되겠냐?
사람이 어떻게 한순간에 바뀌겠나? 세상 일의 팔 할은 정답을 몰라서 못하는 게 아니다. 마치 "국영수 중심으로 예습, 복습을 철저히 했다"는 전교 1등의 말이나 "삼시 세끼 균형 잡힌 식단과 적당한 운동을 하면 다이어트에 성공한다"는 의사의 말을 몰라서 못하는 게 아니듯이 말이다.
마지막으로 S에게 제일 중요한 한 가지만 명심하라고 당부했다.
만약에 너를 싫어하는 누군가가 너한테 자꾸 이것저것 캐묻거나 부당한 업무 지시를 하면 그에 대한 적정한 '대답'을 하려고 애쓰지 마. 누가 물어본다고 해서 반드시 '대답'을 해야 하는 건 아니야.
그러게. 왜 이렇게 자동적으로 대답을 하나 몰라. 그럼 어떻게 해야 해?
맘에 안 드는 질문이나 말을 하면 반드시 대답할 의무는 없어. 그럴 경우 '질문'에는 다른 '질문'으로 대꾸해. 대화 주제를 바꿔서 네가 이 대화를 원하지 않는다는 암시를 주는 거야.
내가 아무리 잘 지내려고 해도 이유 없이 시기 질투하거나 험담을 하는 인간은 어딜 가나 있게 마련이다. 그런 사람과 상종을 하지 않는 게 가장 좋은 방법이지만 불가능하다면 "상대방이 원하는 대답"을 하지 말자.
상대를 짓밟거나 우위에 서야 직성이 풀리는 유형은 본인이 원하는 걸 상대가 주지 않을 때 가장 당황하거나 빡친다.
대놓고 "언니 저 마음에 안 들죠?"라고 말하는 순간, 당신은 상대방에게 주도권을 빼앗긴 거나 마찬가지다.
상대방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직접적으로 표현하지 않으면서 그가 원하는 걸 주지 않는 가장 간단한 방법은 위와 같다. 표정 관리가 잘 안돼도 상관없다. 직접적으로 표현하지만 않으면 된다.
질문에 질문으로 답하는 것은 꽤 짜증 나고 무례한 행동이 될 수 있으므로 매번 그렇게 하지는 말고, 적당히 상황을 봐가면서 하자. 만약 직장 상사라서 그렇게 하는 게 힘들다면 업무와 관련 없는 질문에만 질문으로 하면 된다. 거기에 딴지를 거는 간 큰 상사는 별로 없다.
혹시나 만에 하나 있다면 "사적인 얘기는 회사에서 하고 싶지 않다"라고 딱 잘라 선을 그어라. 사전에 차단하면 오히려 그렇게 인식이 되어서 웬만해서는 안 건든다.
그래도 이유 없이 괴롭힌다면?
빨리 이직 준비 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