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 마음과 의심의 밸런스를 찾아서
너만 알고 있어.
이게 다 널 생각해서 하는 말이야.
잘되라고 하는 말인 거 알지?
어디서 많이 듣던 소리다.
정신분석을 공부하면서 느낀 건, 사람이 허투루 하는 말은 없다.
농담이야. 실언이야. 잘못 말했어.
이런 말들의 무의식에 작용하는 기제는 훨씬 넓고 깊다.
그렇다고 상대방에게 “실수라고? 니 속마음 아니고? 무의식에 잠재되거나 억압된 방어 기제 아니야?
이딴 식으로 말했다간 피곤한 사람, 따지기 좋아하는 예민한 사람 취급받기 딱 좋으니 속으로만 삼키는 걸로.
우리는 하루에도 수많은 말을 주고받는다.
수 백, 수 천 마디 말 중에 진짜 '의미 있는' 말은 과연 얼마나 될까?
아마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 인식조차 하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처음에는 벌 받는 게 겁나서 아무도 섣불리 말을 하지 못할 것이다.
말을 참는 데는 한계가 있으니 자기도 모르게 말이 튀어 나가서 지적 당해 끌려가는 쓸데없는 상상을 해 본다.
아마 사람들은 자기가 말을 하지 않기 위해, 혹은 상대방이 어떤 말을 하는지 귀담아듣고 있다가 그 말대로 하지 않으면 신고를 하는 참극이 벌어질지도 모른다.
말 대신 문자나 메신저가 더 유행할지도 모르겠다. 그마저도 '말'에 해당한다면 세상은 침묵으로 바뀔까?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왜냐고?
사람이 말을 하는 것은 본능이니까. 자신을 표현하고, 상대방과 교감하고 싶어 하는 원초적 본능.
그만큼 말에는 힘이 있다.
상대방이 하는 말에 울고 웃고 오해하기도 하고 감동받기도 한다.
사람을 살리기도 하고 죽이기도 하는 말, 그래서 말을 잘해야 한다.
살면서 어떻게 일일이 말 한마디 마다 신경 쓰고 의미를 부여하겠는가?
그래서 우리는 상대방 말의 ‘진위’를 잘 파악해야 한다.
서두에 말했던 “이게 다 너 잘되라고 하는 말이야.”에 담긴 속뜻은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다.
말 그대로 받아들이면
나: 날 참 생각해 주는구나. 시킨 대로 해야지. -> 고마워:) -> 상대방 : 나만큼 너 생각해 주는 사람 없다? -> 내 말 잘 들어. -> 나: 응!
혹은
나: 웃기시네. 다 너 편하려고 하는 말이잖아? -> 상대방: 사람이 왜 이렇게 꼬였냐 -> 나: 네 말대로 안 하면 다 꼬인 거야? / 남들이 보기에 꼬여 보이나? -> 무한반복
당신은 어느 쪽인가?
나? 순순히 받아들일 줄 알면 지금 이런 글을 쓰고 있지도 않겠지.
때론 편집증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망상에 가까운 음모론을 펼치긴 하지만 처음부터 이랬던 건 아니다.
어릴 때는 그 누구보다 말 잘 듣는 착한 애였다. 부모나 선생님의 칭찬에 목마른 인정 욕구가 강한 아이.
그 내면의 아이는 지금도 남아서 일이 뜻대로 되지 않거나 좌절할 때 마다 튀어나온다.
이제는 그 아이를 달래거나 키우지는 못해도 적어도 정면으로 마주할 정도의 짬은 생겼다.
요즘 한참 논문 준비에 정신이 없다.
처음 써 보는 거라 자기 객관화가 덜 된 상태에서 나보다 공부 구력이 긴 사람이 하는 말에 쉽게 휘둘리게 되는 자신을 발견했다.
교수의 ”이대로 쭉 써보세요! “라는 한마디에 속아서 박사 논문보다 더 긴 논문을 장대하게 써낸 것까지는 그렇다 치자. (돌이키기엔 너무 멀리 왔다.)
어리바리 신입생일 때부터 도움 되는 말을 많이 해 주는 선배가 있다.
그분은 다른 대학원에서 석사를 마치고 나와 같은 학교에서 박사 과정 중인데 민간 연구소에서 임상분석까지 받고, 현장 경험도 있는 분이어서 그분의 말을 열심히 경청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이게 아닌데?” 싶은 순간이 있었다. 그럴 때마다 “이제 석사 햇병아리가~”운운하며 걸음마도 안 떼고 달리려고 하지 말라고 했다.
뭔가 분하지만 나보다 앞서 이쪽 길을 걸었고, 정보를 얻기가 귀한 마당에 그 선배의 경험은 중요해 보였다.
적어도 내 사생활을 다른 사람에게 까발리고 다닌다는 사실을 알기 전까지는.
혼자 외롭게 이 공부를 하면서 개인적으로도 힘든 일이 있어 믿고 말할 상대가 필요했다.
난 그 선배의 말 한마디가 다 ‘배려’라고 생각했고, 누구에게도 터 놓지 않던 내 속얘기를 털어놨다.
너무 얘기했나 싶어서 혹시나 하는 마음에 “누구에게도 말하지 말아 달라”라고 따로 당부까지 했었다. (참 순진하기도 하지.)
전혀 생각지도 못한 장소에서, 생각지도 못한 엉뚱한 사람에게 예상치도 못한 내 사생활을 듣게 되었을 때의 충격이란.
일차로 충격, 이차로 잘못한 것도 없는데 얼굴이 화끈거렸다. 나 자신이 위선자가 된 것 같아서.
다 알면서 모른 척 듣고 있던 그 사람은 “그 선배에게 들었다는 말 하지 말아 달라”며 역으로 다짐을 받았더랬다.
뒤통수를 세게 후려 맞은 후로 이성적으로 생각해 봤다.
그 선배는 평소 “자기가 열심히 하려고 해서 하는 말인데, 혼자만 알고 있어야 돼! 내 덕에 시간 절약했지?”라는 식의 말을 자주 했다.
그러면서 나는 몰랐던 다른 사람의 사생활까지 ‘은밀히’ 공유하며 마치 대단한 정보의 권력을 쥐고 있는 냥 행동했더랬다.
그땐 뭔가 석연치 않은 감이 있었지만 결국엔 나도 ‘공범’이었다. 남의 사생활이나 뒤에서 듣고 이러쿵저러쿵 떠드는 저질.
인과응보라고 했던가. 그 선배에게 직접 따질 생각도 해 봤다. 곧 관뒀다. 얻을 ‘이득’이 없기 때문이다.
그 선배 성격상 잘못을 인정하긴커녕 “뭘 그런 걸 가지고 그러냐?”며 유난 떠는 사람 취급할 게 뻔하니까. 평소에 자기 얘기하기를 좋아하는 사람이니 더 그럴 수밖에.
일단 마음의 선을 긋고, 나도 필요한 만큼만 그 선배를 대하기로 했다.
논문 작업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면서 많이 배우며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내고 논문 초고를 완성할 무렵, 그새 많이 성장했음을 느꼈다.
이번에 그 선배도 같이 논문 심사를 들어가는데 암만 들어봐도 내가 하는 공부의 반의 반도 안 됐다. 그만큼 공부 구력이 있으니 그러려니 했다.
아무리 그래도 교수 피드백도 제대로 안 받고, 자기 식대로 밀고 나간다는 말은 너무 어이가 없었다.
내가 힘들다고 징징대면서 교수한테 받은 긍정적인 피드백을 살짝 흘리니까 역시나 예상했던 반응이 나온다.
“그렇게 이것저것 다 보지 말고 범위를 좁혀야 한다" "분량만 늘려가지고 가면 절반 이상 줄이라고 삭제당할 수 있다" "왜 교수는 너만 봐주냐?"는 식의 말을 반복했다.
물론 그 사이에 “애썼다” “고생했네"라는 말을 섞긴 했지만 말속에 묻어난 진의가 느껴졌다.
시기, 질투심. 내가 제일 잘나야 한다는 사람은 겉으로는 티 내지 않으려고 무진 애쓰지만 은근히 시기 질투가 많다.
자신과 결이 다르거나 자신이 중심이 되지 않으면 대놓고 까고 본다.
통화 한번 했다 하면 기본이 한 시간, 두 시간을 귀에서 열이 나도록 하는데 팔 할이 자기 얘기다.
그러면서 이번에 박사급만 알 수 있는 고급 정보라며 인심 쓰듯이 ‘나한테만’ 알려 준단다.
만약 누군가가 “진심으로” 나를 위해 하는 말이라도 무조건 받아들일 필요는 없다.
거절한다고 해서 그 사람의 “진심”을 폄하하는 건 아니다.
상대방이 그런 식으로 몰아가며 죄책감을 유발한다면 그건 배려가 아니라 ’ 가스라이팅‘일 확률이 높다.
나 또한 그동안 당한 게 많아서, 사람한테 잘해주고 상처받은 게 많아서
상대방과 그 어떤 서사도 만들기 전에 과거의 트라우마를 투사하진 않는지 자기 검열이 필요하다.
열린 마음과 의심 사이에서 갈팡질팡 하게 될 수도 있다.
시행착오를 겪더라도 중요한 건, 결정적인 순간에는 언제나 나는 내 편이어야 한다.
나마저 내 편을 들지 않으면, 내 말은 누가 들어주나?
상대방의 공허한 말을 위안 삼으려고 할수록 남에게 조종당할 위험이 크다.
남의 '말'에서 위안을 찾기보다 내면과 대화하는 시간을 가지려고 노력한다.
상대방이 말로써 나를 정의하게 두지 않는다.
위로와 공감을 받기보다 '주는' 사람이 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