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보는 것은 네가 보는 것이 아니다

라캉 '응시' & 장자 '관조'

by 백소피
우리를 에워싸는 응시,
자기 모습을 드러내지 않을 채 우리를 응시되는 존재로 만들어 버리는 응시,
바로 그러한 응시에 의해 우리는 응시되는 것에서 만족을 느낀다.
- 라캉, <자크 라캉 세미나11 - 정신분석의 네 가지 근본 개념>
라캉의 '응시', 시선(gaze, 佛 regard).

라캉은 사르트르의 현상학적 분석을 참조하면서 자신의 사상에서 처음으로 응시 개념을 도입한다.

사르트르에게 시선이란, "주체로서의 대타자와 근본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나의 관계는 대타자에 의해 내가 '보여질'(being-seen) 수 있다는 영원한 가능성을 다시금 참조해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단 한 지점에서 볼뿐이지만,

나의 실존 속에서 나는 사방에서 응시되고 있다.


시선은 바라보는 행위의 대상이 되거나 시각 욕동의 대상이 되므로

시선은 더 이상 주체 쪽이 아니다.


"내가 당신을 바라보는 그 자리에서 당신은 결코 나를 볼 수 없기 때문"

바라보는 눈과 시선 사이에는 일치나 공존이 있을 수 없다.


우리가 우주에 로켓을 발사하고, 사람을 우주로 보내서

인공위성으로 지구와 온 우주를 '응시'한다고 해도

우주 전체를 다 볼 수는 없다.


우리가 시각을 통해 사물을 바라볼 때

미끄러지고 통과되면서 결국 항상

어느 정도는 빠져나가 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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昔者莊周夢為蝴蝶,栩栩然蝴蝶也,自喻適志與!不知周也。
俄然覺,則蘧蘧然周也。
不知周之夢為蝴蝶與,蝴蝶之夢為周與?周與蝴蝶,則必有分矣。此之謂物化。
옛날에 장주(장자의 이름)가 꿈에 나비가 되었는데, 훨훨 나비처럼 날아다니는 것이 스스로 기뻐 제 뜻에 맞았더라! (그래서) 장주를 알지 못했다.
그런데 갑자기 깨어, 곧바로 뚜렷이(혹은 놀라서 보니) 장자가 되었다.
알지 못하겠다. 장자가 꿈에 나비가 된 것인가, 나비가 꿈에 장자가 된 것인가? 장자와 나비 사이에 반드시 구분이 있다. 이것이 만물의 변화.
- 장자, <제물론> 중 나비의 꿈(胡蝶之夢)
관조(觀照)

우리의 인식 활동은 대부분 능동적이거나 적극적인데 반해

관조는 수동적이다.


우리가 세계를 전면적으로 인식하거나

전체를 포착하는 일은 불가능하다.

세계를 보아야 하는 대로 보지 않고,

그저 보이는 대로 보는 것이 관조이다.


나 자신을 남이 보는 대로 보지 않고,

내가 보고 싶은 대로 보지 않고,

보이는 대로 덤덤히 '관조'하는 성찰적 태도를 터득할 때

우리는 세계와 일체를 이룬다.


내가 장자인지 나비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만물 변화의 원리, 도(道)에서 이것은 의미가 없다.


우리가 어떻게 그 인식의 한계를 벗어나 자유롭게 '관조'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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