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택영 저, '감정 연구' & 영화 ‘어디 갔어, 버나뎃’
감정은 고독, 착각, 후회, 집착, 공감과 마찬가지로 진화의 산물이기에 자의식적이다.
- 권택영, <감정 연구>, 글항아리, 2021, 머리말.
뇌는 디스카운팅 메커니즘을 따른다는 말을 아는가?
누가 선물을 줬다고 가정해 보자. 그게 마음에 쏙 드는 다이아몬드 목걸이면 처음에는 정말 행복하다. 다음 날에도 행복하지만 전날만큼은 아니다. 1년 뒤에는 목걸이에서 아무런 감흥도 느끼지 못한다.
뇌는 왜 이러는 걸까?
살아남기 위해서다. 원래의 것에 익숙해져야만 새로운 위협을 감지할 수 있으니까.
엄마도 그랬던 것 같다. 위험 신호에만 온 신경을 집중하느라 삶의 아름다움은 다 잊어버린 것 같았다.
- 영화 <어디 갔어, 버나뎃>, 영화의 첫 장면 : 주인공이 남극으로 도망가서 카누를 타는데 이때 나오는 딸의 독백
우리 인간은 생존을 위해 체내 상태를 일정하게 조절하려는 '항상성'이 있다.
책 <감정 연구>에서 "항상성은 몸의 구성에도 관여한다"라고 한다. 위기에 대응하는 능력은 두려움이라는 감정이 일어나야지만 가능하다. 동물은 몸의 행동으로만 나타나는 반면 인간은 자의식이 발달했기 때문에 해마의 도움으로 전두엽에 전달되어 '느낌'으로 나타난다.
나만의 고유한 '느낌'은 인간의 창의성을 발휘하게 한다. 오직 인간만이 문학을 창작할 수 있고, 작품을 감상하며 항상성을 높일 수 있다. 인공지능이 문학을 하고, 작곡을 하는 시대이지만 아직까지는 인간처럼 항상성을 높일 정도의 능력을 가지고 있지 않다.
우리는 문학을 감상할 때 감정을 동일시하여 감정을 정화하며 끝을 맺는다. 특히나 잘 짜인 플롯을 가진 감동 깊은 극이나 예술 장르를 접했을 때 카타르시스를 느낄 수 있다. 극의 흐름에 따라 팽팽한 긴장감과 감정의 어둠과 변화 속에서 마지막에 그것들을 배설하여 정화시키는 과정을 거친다. 그 뒤에 찾아오는 평온함은 항상성을 유지하게 한다. 너무 메마르거나 너무 넘치지도 않은 적절한 감정 유지가 생존의 첫 번째 조건이다.
인간은 살면서 외부 자극의 침입을 끊임없이 받는다. 그런 자극에 따라 감정의 반응이 다르다. 이때 너무 지나치지 않도록 조정해야 내적 평온이 유지되는데 그렇지 못할 경우 만병의 근원인 스트레스를 받는다. 예술은 의도적으로 감정을 자극함과 동시에 정화시켜 도파민으로 우리의 감정이 항상성을 유지하게 돕는다.
"감정은 날씨와 같다"라는 말이 있다.
비가 오거나 눈이 오거나 때론 날씨가 맑을 수는 있지만 내 의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므로 너무 일희일비하지 말라는 의미로 쓰인다. 인간은 '항상성의 원칙'이 있기에 생존할 수 있는 것이니 지금 나에게 일어나는 어떤 감정이 있다면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분석할 필요가 있다. 내가 지금까지 정신분석을 공부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감정 연구>에서 항상성을 높이는 것과 예술의 연관성을 읽으면서 어쩌면 인류가 생존을 위해 발명한 최고의 수단이 '예술'이 아닐까 싶다. 지적 추구와 함께 도파민이 발생하는 즐거움을 선사하는 행위는 모든 인간에게 꼭 필요하다.
누구나 예술가가 될 수 있다. 반대로 예술가가 되어야 하는 사람이 역행하는 삶을 살 경우 항상성은 무너진다. 내적 흥분의 긴장을 감소시키고 일정하게 제거하는 것이 오랫동안 억압되면 다양한 병리적 형태로 나타날 수 있다.
영화 <어디 갔어, 버나뎃>의 주인공 버나뎃이 그러한 경우다.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비롯해 수많은 상을 수상한 연기파 배우 케이트 블란쳇이 연기한 버나뎃은 최연소 천재 건축가였지만 작품이 매도당하는 충격적인 사건을 겪은 뒤 은둔하게 된다.
너무나 자신만만하던 젊은 천재 예술가는 시련에 맞서는 대신 결혼으로 도피한다. 게다가 어렵게 낳은 딸이 선천적인 심장 기형이라서 그녀의 온 신경은 예술 대신 딸아이를 양육하는 것에만 집중되어 있다. 자상하고 능력 있는 남편과 건강을 되찾고 똑똑하고 자신과 잘 통하는 딸이 있기에 나름대로 만족하며 산다.
버나뎃은 자신이 만족하며 사는 줄 알았지만 실상은 그렇지 못하다. 만성적인 불면증에 외부와의 교류를 극도로 꺼리며 심지어 사람을 대해야 하는 집안일도 온라인 비서를 통해 해결한다. 자신만의 세상 속에서 만족하며 살고 싶지만 외부의 자극은 끊임없이 버나뎃을 자극한다.
어느 날, LA에서 건축가로 활동하던 시절의 동료를 만나 지금 사는 시애틀에 대해 끊임없이 불평을 늘어놓기 시작한다. 지칠 줄 모르고 한참을 떠들던 버나뎃의 얘기를 묵묵히 듣고 있던 동료가 던지는 한마디에 그녀는 정곡이 찔린다.
너 같은 사람은 창작을 해야 해! 그렇지 않으면 사회에 위협이 되지.
자신 안에 갇힌 예술적 본능을 아무리 억압해도 어떤 식으로든 분출을 하지 않으면 살 수 없다.
더 이상 모른 척할 수 없을 정도로 자신을 잃어가고 있을 때쯤, 일련의 사건에 휘말려 타의로 집을 탈출해 남극으로 가게 된다. 그곳에서 우연히 남극 기지를 새로 짓는다는 소식을 듣고 드디어 자신만의 에너지를 방출할 기회를 얻는다.
항상성의 원칙에 이하면 인간은 생존하기 위해 체내 상태를 일정하게 조절하려고 한다.
버나뎃은 생존하기 위해 위험 신호, 즉 외부의 자극에만 온 신경을 집중하고 자신의 욕망은 억압했다. 위험 신호에 집중하면 할수록 더욱 일은 꼬였고, 사람들과 점점 멀어졌다. 급기야 자기 자신을 잃어버릴 지경에 이르러 남극이라는 탈출구로 회피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방어기제일지도 모른다.
도망치듯 온 남극에서 그동안의 외부 자극이 단절되자 잊고 있었던 자신의 욕망과 마주하게 된다. 자신을 똑바로 인식하게 된 것이다. 버나뎃은 위험 신호뿐만 아니라 자신의 기질에 충실하게 됨으로써 비로소 항상성의 원칙에 따르게 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사회에 위협적인 존재로 낙인찍히며 외부의 자극에 무방비한 상태로 있던 버나뎃은 탈출을 감행하며 다시 자신의 재능을 발휘할 기회를 얻는다. 그녀는 가족이나 이웃과 충돌할 때마다 극도의 불안으로 심장이 쿵쾅대지만 다시 창작을 할 기회가 생기자 "좋은 의미로 심장이 두근거린다"라며 흥분하다. 생각만 해도 카타르시스를 느끼는 것이다.
살면서 '감정'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난감할 때가 많았다.
'항상성의 원칙'을 알게 된 후, 자극에 의한 감정의 반응이 일어나면 제로(Zero, 0)로 감소시키려는 경향이 어떤 식으로든 방해받을 때 감정적으로 무척 힘들었다.
뇌과학자 다마지오에 의하면 우리 몸은 70퍼센트의 부정적인 감흥과 30퍼센트의 긍정적 감흥의 비율로 나뉘어 있다. <감정 연구>의 저자에 의하면 "우리는 행복, 기쁨, 평화보다 혐오, 공포, 노여움, 슬픔, 죄의식 등 끝없는 고통과 아픔의 사슬 속에서 헤어 나오지 못할 때가 더 많다."라는 것이다.
그야말로 삶은 고통이자 고행이다.
그렇다고 이 고통을 끝내기 위해 불교에서 말하는 죽음으로 승화하는 '열반'에 이를 수는 없지 않은가.
나에게는 아직까지 채워지지 못한 욕망이 너무 많다. 욕망 자체가 채워지지 않는 결핍이라지만 아직은 버나뎃처럼 '심장이 쿵쾅거리는' 경험을 해 보고 싶다.
살면서 수많은 도전과 모험을 했다고 자부했지만, 돌이켜보니 안전한 울타리 안에서 버나뎃처럼 위험 신호에만 귀를 기울이느라 용기가 부족했다.
이제부터라도 항상성을 높이는 법을 배워야겠다.
내 안에 내재된 오래된 항상성의 DNA를 믿고, 독창성과 상상력을 마음껏 발휘할 수 있기를.
매일 조금씩,
오늘보다 내일 한 뼘 더 다가가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