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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ophy Oct 29. 2020

다정하지 않은 다정함

나의 자는 얼굴을 기억하는 사람

내 친구는 다정하지 않다. 친구가 된 지 18년째다. 나는 한 번도 그가 불필요한 다정함을 나누는 것을 본 적이 없다. 사람들은 늘 그가 까칠하다고 했다. 사실 가까이에서 보면, 두루뭉술하게 따스한 말을 건네기보다 확실한 말을 건네고, 모두가 좋아하는 적당한 것보다 정말 필요한 것을 주는 친구였다. 그러니까 그 친구는 정말 다정하지 않다기보다는, 정확한 곳에 마음을 주는 것 외에 관심이 없는 사람에 가까웠다.


어릴 때부터 나는 그 친구에게 사람의 행동이나 관계, 태도에 관한 것들을 자주 물었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묻고도 늘 좌충우돌하며 다 겪어보고 또 치대곤 했다. 언니는 미리 알고 적당히 차단하면서 스스로를 잘 지키는데, 나는 왜 그걸 못해서 매번 이 고생이냐고. 사서 하는 그 고생은 20대 초반이면 끝날 줄 알았지만, 모든 사람은 다 다르고, 그 개별적인 존재가 매번 궁금하기에 나는 또 부딪히고 깨지고 다시 깨닫는다. 그런 나를 보면서 친구는 늘 이야기해준다. "네가 모르는 게 있는데, "라며.


그렇게 시작하는 이야기는, 대체로 정말 내가 몰랐던 거다. 약 십 년 간, 내가 내 안으로 침잠하는 고통을 겪는 사이에, 그 친구는 사회에서 구르고 깨지면서 수많은 사람과 상황을 겪었으니까. 겪었던 이야기를 자세히 말하지 않아도, 한 꺼풀 더 씌워서 내게 하는 조언의 형식을 띨지라도, 담담히 건네는 말속에 그동안 그가 겪었을 삶이 비친다. 넘어져서 생긴 무릎의 상처, 이제 아물었지만 여전히 남은 거뭇거뭇한 흔적이 보인다. 그걸 끌어안고 내게 건네는 그 말에 묻어온 다정함을 안다. 그래서 나는 그 말이 온 방향으로 가만히 마음을 기댄다.


친구가 엊그제 그랬다. 안 좋은 사람을 단호하게 잘라내는 내가 강해 보이겠지만, 사실 나는 감당하지 못할 걸 알고 미리 잘라내는 거라고, 그만큼 나의 내부는 약한 거고, 다만 사회생활을 오래 하면서 스스로를 지키는 연습이 된 것뿐이라고 했다. 그리고 이어서 말했다. 너는 상처 받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심지어 그 감정을 끝까지 추적해서 관계의 의미가 무엇이었는지, 네 마음의 바닥이 무엇이었는지 밝혀내는데, 어쩌면 그게 더 강한 걸지도 모르겠다고. 그래서 나는 글을 쓰지 않고, 너는 글을 쓰는 것 같다고. 친구는 나도 모르는 나의 강함을 그렇게 찾아내 준다.


문득 사람 때문에 힘들어서 제주로 도망친 때가 생각났다. 그때도 친구는 시간을 내줄 수 있냐고 묻고 조심스레 찾아왔었다. 아무도 만나고 싶지 않다고 했지만, 이상하게 싫지 않았다. 별 말없이 함께 걸었던 숲길이 좋았다. 떠나던 날 갑자기 이거 엄청 맛있다면서 동네 슈퍼에서 사주고 간 오레오 맛 시리얼의 단맛이, 그가 떠난 뒤에도 꽤 오랫동안 위로가 되었다.

지난번에 친구는 제주 여행을 되새기며 이런 말을 했다. 그 날 제주에서 네가 자고 있는 얼굴이 힘들어 보여서, 그날부터 한동안 걱정을 많이 했다고. 그런데 요사이 네 얼굴이 너무 좋아서 안심된다고. 나는 내가 그런 얼굴인지 전혀 몰랐다. 5년도 더 된 날이다. 타인의 자는 얼굴을 그렇게 오랫동안 기억한다는 것은 어떤 마음일까. 나도 모르는 나의 자는 얼굴을 알고 있는 사람은 내게 어떤 의미일까.

나를 그렇게 걱정하는 그 친구는, 정작 자기 책상 앞에 "Don't worry, just breath. If it's meant to be, it will be find it's way."라는 문구를 붙여 놓고 일한다. 담담하고 냉정해 보이지만, 그 단단한 껍질 안에서 매번 긴장하고 벌벌 떠는 그를, 나는 안다. 내 자는 얼굴을 그가 아는 것처럼, 그가 모르는 그의 약한 부분이 나는 보인다.

다정하지 않은 친구가 사는 그 집에는 사실 다정함이 바닥에 조용히 깔려 있다. 나는 친구의 집에 갈 때마다 바닥을 슬며시 밟으며, 밤이 되면 친구가 바닥에 깔아준 이불에 등을 갖다 대며 그 다정함을 느낀다. 그 집에 머물며 친구의 곁에 있으면, 나는 때때로 울지 않았는데도 실컷 울고 난 기분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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