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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를 발견하는 일

진짜 당신을,

by 김지연

그 날 갑자기, 스물넷의 내가 글을 계속 쓰고 싶다는 이야기를 했다고 친구가 기억해냈다. 했던 말은 정확히 기억나지 않았지만, 친구의 입에서 나온 말의 리듬을 타고 그때의 마음이 다시 살아나서 반짝였다. 친구는 지금 글을 쓰고 있는 나를 보며 나도 잊고 있었던 당시의 나를 다시 발견해줬다. 몸의 방향을 틀던 때에도 네 시선은 계속해서 여기였다고.

최근 친구들과 함께 소중히 여기는 가치에 대해 생각해 볼 기회가 있었는데, 결과가 익숙하면서도 충격적이었다. 내가 마지막으로 남긴 세 가지 가치는 '가족', '마음이 통하는 친구', '솔직한 대화를 나누는 시간'이었다. '일(내가 납득할만한 방식으로 잘하는 것, 내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과 '온전한 내 시간과 공간'처럼 망설임 없이 가장 먼저 썼던 가치가 아니라, 조금 뒤에 썼던 것들이 살아남은 건 놀라운 일이었다.

먼저 썼던 가치들은 어쩌면 내가 머리로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들이었을 테다. 평소 내 마음의 방향, 내 삶을 가장 잘 설명하는 것들은 나머지 세 가지였을 테고. 영 모르는 것은 아니었지만 새삼 깨달았다. 나는 사랑하는 사람들과 마음을 나누는 일이라면 온전한 내 것도 내어줄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렇게 친구들 덕분에 나를 재발견하고 난 다음 날 아침, 음악과 꽃을 선물 받았다. 사랑하는 사람들과 마음을 나누고 집에 돌아와 차분히 마음을 가다듬으며 들으면 어울릴 Luke howard의 Portrait Gallery, 그리고 나의 내면과 향기가 닮았다며 히아신스를. 누군가에게 나는 이렇게 잔잔하고 또 향기가 나는 사람이구나.

작년까지는 무언가 발견하기 위해 자꾸 밖으로 나가고 멀리 여행을 떠났는데, 올해는 멀리 가지 않고도 자꾸 무언가를 발견한다. 특히나 내 자신을 더 자주, 많이. 존재의 범위가 넓어지고 삶의 레이어가 두터워진다. 나를 자꾸 발견해주는, 발견하게 만들어주는 사람들 덕분이다. 여느 때보다 사람의 힘을 많이 느끼는 해다.

영화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에서 료타는 지금까지 키워 온 케이타가 아닌 처음 보는 아이 류세이가 자신의 핏줄이라는 것을 알게 되고, 그 아이를 바라보기 시작한다. 자신과 닮은 점이 보이고, 낯설지만 가까워지고 싶다. 료타가 류세이라는 존재를 발견한 것은 진짜 자기 아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지만, 사랑은 사실 거기서 시작되지 않는다. 료타는 자기 핏줄이 아니더라도 여전히 케이타를, 노곤하게 자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아 온 그 아이를 사랑했으니까.

내가 '가족'이라는 가치를 가장 소중히 여기는 것도 단지 혈연이 이유는 아니었다. 어떤 순간들을 같이 겪어내는 과정에서 그 사람의 삶을 더 깊이 이해하게 되었고 반대로 나의 삶도 이해받고 있다고 여기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시간을 함께 보내며 서로를 다시 발견해왔다. 서로를 발견하지 못한다면 가족도 가족이지 않을 수 있고, 반대로 그런 과정이 있다면 어떤 누구도 가족이 될 수 있을 테다.

그러니까 누군가를 발견하는 건, 혈연이나 운명처럼 정해진 일이 아니다. 한 사람의 과거-현재-미래, 그 과정 속에 쌓아 온 그 사람만의 결, 그러니까 존재의 맥락을 알면 사람을 바라보는 시선이 깊어진다. 눈에 보이는 지금만이 아니라, 한 사람의 컨텍스트를 이해하고 사랑하게 될 때, 낯선 타인은 의미가 된다. 알아 온 시간과 비례하지도 않고, 쉽게 만날 수 있는 일도 아니다. 그래도 살아가는 결과 존재의 맥락을 받아들여주는 사람과 관계 맺고, 그런 사람들에 의해서 삶의 면면이 발견되는 것은 무엇보다 좋은(이라는 단어보다 더 적절한 단어를 찾고 싶지만 아무튼) 일이다.

올해 만난 그런 순간들처럼, 나도 몰랐던 나를 알아봐 주는 사람들을 계속해서 만날 수 있기를, 나 역시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발견을 멈추지 않기를, 그렇게 진짜로 만나는 관계들로 삶이 채워지기를 바란다. 또한 누군가의 눈을 통해 또 다른 나를 발견한 순간 내 마음이 반짝 빛났던 것처럼, 어떤 식으로든 내가 몰랐던 나를 알게 해 주었던 사람들의 마음 역시 가을볕 아래 빛났으면 좋겠다. 그리고 그 빛 아래의 당신을, 나도 다시 발견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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