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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과 팔월

지나 보내지 못할 것은 없다

by 김지연

팔월이 끝났다.

주말에 읽은 시에선 '팔월'과 '8월'이라는 단어가 함께 등장했다. '팔월'은 아주 강렬한 감정의 늪에서 헤어 나올 수 없었던 여름을 상징하는 시어였다. 행과 연을 넘어 계속해서 '팔월'이다가, 마지막 행에 이르러 '8월'이 되었다. 한 시절 다 정리해서 지나 보내고 나면 그 강렬했던 '팔월'이 누구나 흔하게 부르는 '8월'이 되는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최근에 자주 보이던 #여름이었다 라는 태그는, 아무 얘기나 써놓고 '여름이었다'만 붙이면 왠지 그럴싸해 보이고 문학적 느낌이 난다는 유머였다. 웃자고 하는 소리가 또 그럴싸해 보이는 건, 실제로 여름이란 그렇게 강렬하게 흔적을 남기는 계절이기 때문이다. 별것 아닌 사소한 감각들도 여름의 뜨거운 온도, 비와 습기, 어지러울 정도로 쨍한 햇살, 생동하는 자연, 방학이나 휴가의 의외성 같은 요소가 더해지면 왠지 특별해진다.

여름 한 철을 다룬 영화가 유난히 많은 것도 그래서일까. 특히나 성장 영화에서 여름의 배경이 자주 등장하는데,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분위기다. <기쿠지로의 여름>이나 <진짜로 일어날지도 몰라, 기적>에서도 그랬고, 몇 년 전 부산영화제에서 우연찮게 연달아 보며 90년대 여름의 감각을 잔뜩 환기했던, <프리다의 그해 여름>과 <여름의 끝>도 그랬다.

영화에서 그리는 여름은 항상 한여름밤의 꿈처럼 아름답고, 밀려오는 파도처럼 거세다. 그리고 그 끝에는 나이테 같은 성장의 흔적이 남는다. 여름을 보내며 한 뼘씩 자라나는 것은 아이들만이 아니다. 청소년이든 어른이든 겪어낸 강렬함만큼 마음이 깊어지거나 넓어진다. '여름이었다'라는 말이 모두에게 의미심장하게 들리는 건 다 이유가 있다.

마지막의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는 원고 교정을 보는 사이에 8월의 마지막 날이 끝났고, 9월이 밝았다. 서울을 벗어나지도 않았지만 어쩐지 한바탕 멀리 휴가라도 다녀온 듯한 여름이 끝났다. 그만큼 넘실대는 파도처럼 보낸 계절이었다. 모순으로부터 시작해 모순으로 끝나고, 보이거나 보이지 않는 흔적들을 여기저기 남겼지만, 어쨌든 여름은 갔다. 내게 남은 흔적들도, 오롯이 성장의 나이테라면 좋겠다.

세상은 여전히 어지럽고 아직 구원의 기미가 딱히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나는 지난 주말 하루는 춤추는 감각으로 살았고, 하루는 에어컨 바람 아래에서 좋아하는 노래를 들으며 시를 읽었고, 다른 사람들과 시를 나눴고, 그걸 되새겨보며 단잠을 잤다. 어지러운 바깥세상과 달리 비현실적인 일상, 그렇지만 이것보다 더 비현실적인 현실. 비현실의 기준조차 애매한 시절이다.

삶은 밀푀유보다 몇 배나 더 많은 겹의 모순으로 이뤄졌지만, 반대로 생각하면 그 비논리적 서사가 절망과 희망이 공존 가능하다는 증거다. 어쩌면 그게 살아가는 힘일지도 모르니, 멈추지 않고 연속되는 이 모순의 흐름 속에서 구원의 기미를 찾아보려고 한다.


그래서 모순으로 점철된 여름에서 사다리를 타고 빠져나와 다음 계절을 맞이한다. 다음 계절 역시 새로운 모순으로 가득 찼을지라도. 삶은 멈추지 않고 일상은 이어지며 계절은 자리를 바꾸며 반복된다. 그렇다면 지나 보내지 못할 일도, 괜찮지 않을 일도 없다.


가을이 완연할 때쯤이면 이 여름도 어느새 발아래 묻힌 계절이 되고, 다른 계절의 모순은 또 다른 나이테를 만들고 있을 테다. '여름이었다' 정도로 살짝 곱씹을 기억만 남을 즈음이 되면 나의 '팔월'도 누구나 흔히 부르는, 넘겨 버린 달력 위의 숫자 '8월'이 되어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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