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Sophy Nov 01. 2020

디테일리스트의 힘

심플하고 낭비 없는,

인쇄 감리를 따라간 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지만 사실 궁금한 마음이 가장 컸다. 원래 어떤 일의 과정이나 원리를 몹시 궁금해하는 인간인 데다가 뭐든 알아두면 다 쓸 데가 있어서 기회가 되면 봐 두려고 하는 편인데, 이번 책은 출판사 대표가 친구다 보니 종이 고르기부터 디자인 미팅, 인쇄 감리까지 책 만드는 전 과정을 견학하고 있다. 역시 현장은 영화나 드라마에서의 그것과 사뭇 분위기가 다르다.

어제저녁 갑자기 감리 일정이 잡혀 (원래 그렇다고 한다) 오늘 아침부터 인쇄소에 불려 가서 대여섯 시간을 꼬박 보냈는데, 각 부분 샘플이 인쇄되면 확인하고, 인쇄 들어가고, 다시 샘플 인쇄 확인하고 인쇄하고의 연속이었다. 인쇄소 사장님이 큰 맘먹고 들였다는 (아주 비싸고 큰) 최첨단 인쇄 기계를 통해 종이가 착착착 인쇄되는 규칙적인 소음과 한 파트가 끝나면 울리는 동요스러운 멜로디는 덤으로 듣는 BGM.

두껍지 않은 책인데도 인쇄되는 종이는 수천 장이었다. 인쇄 도중 문제가 있는 것들은 수십 장씩 가차 없이 버려졌는데, 문제가 있다곤 해도 미세한 인쇄 문제여서, 내 눈에는 겉보기에 아주 멀쩡한 종이 뭉치들이 쓰레기통으로 직행하는 걸로 보였다. 아마도 자르거나 제본하는 과정에서 또 버려질 것이다. 인쇄비에는 저 종이와 인쇄 비용도 다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을 새삼 새기며, 한편으론 과연 내 책이 저 많은 종이의 희생과 환경에 끼친 악영향보다 가치 있는가 생각했다. 게다가 이 많은 사람들의 노고까지 더해 만들어진 책이라면, 그 내용과 물성을 세상에 드러내는 이유가 꼭 있어야 할 텐데.

현장에 오면 재밌는 점은 또 이런 거다. 인쇄된 종이 한 장에서도 인쇄 기술자와 디자이너가 눈여겨 확인하는 부분이 각자 다르고, 디자이너의 눈으로 찾아낸 문제의 수정 여부를 물으면 인쇄기술자 쪽에서 거의 바로 답변이 나온다. 각자의 노하우가 있어야 가능한, 심플한 문답이다. 디자이너는 그 과정에서 인쇄소에 넘기기 전에 수정했어야 될 부분을, 작가는 자료를 수집할 때부터 유의했어야 될 점들을 새로 배운다. 편집과 디자인까지의 과정에서는 몰랐던 디테일들이다. 한편 인쇄소 내에서는 각자 담당하는 바가 다른 사람들이 어긋남 없이 규칙적으로 움직인다. 이들은 손발을 움직이는 모양새에서 낭비가 없다.

우리는 전문가라고 하면 눈에 띄는 직업 몇 가지를 연상하지만, 사실 오랜 노하우를 가진 전문가들은 어느 분야에든 있다. 그들이 일하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전문가여야 구현 가능한 디테일을 발견하고 배우는 건 작지면 경이로운 일이다. 그런 디테일들이 구석구석 빛나는 세상은 섬세한 빛깔로 알록달록하다. 팬톤 컬러칩을 정렬해 놓은 느낌 같은 것. 그래서 자기 일에 치열한 디테일 리스트라면 누구라도 호감과 존경을 보낼만하다. 그들이 각자의 자리에서 움직이는 세상이라면 어쩐지 안심하고 살아가도 괜찮을 것 같다.

별 것 아닐 수 있지만 그래도 오늘 눈으로 보지 않았다면 깨닫지 못했을 작은 틈의 생각들을 모아서 언젠가 '인쇄소에 앉아서 생각한 것들'이라는 글을 써야 될지도 모르겠다. 인쇄소에 앉아서 버려지는 종이를 보며 갑자기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지난 원고를 반추하고, 낭비 없는 움직임들을 관찰하면서, 디테일에'만' 집착하는 사람이 아니라 디테일'까지' 멋진 것을 만드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생각했다.

꼭 글만이 아니라 일상이나 관계도 그렇다. 누구보다 나을 필요는 없지만, 누가 봐도 나라는 표시는 확실하게 묻어나는 디테일을 갖고 싶다. 그 디테일들이 쌓여서 더욱 심플하고 낭비 없는 정수가 된다면 좋겠다. 그리고 언젠가는 책을 만드는 데에 드는 여러 희생에도 불구하고 꼭 존재해야 되는 걸, 스스로도 그런 확신을 가질 수 있는 걸 써낼 수 있다면 더욱 좋겠다.

작가의 이전글 내가 믿는 방식의 긍정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