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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ophy Nov 01. 2020

처음의 마음

반짝반짝 빛나는

최근 반짝이는 그림들을 봤다. 김은주 작가는 어마어마하게 예쁜 컬러감으로 별의 물질을 그렸고, 배정윤 작가는 청량한 한여름의 색을 담은 그림들로 전시장을 한 편의 미스터리 소설처럼 구성했다. 두 전시 모두 작가의 첫 개인전이었다.

이제 막 자신의 이야기를 세상에 꺼내 놓기 시작한 사람들, 그래서인지 그림이 생동하고 있었다. 그림을 통해 느껴지는 그 에너지가 너무 빛나고 예뻐서, 왠지 와락 안아주고 싶은 기분이었다. 전시장을 나왔을 때는 어쩐지 마음에 시원한 바람이 불었다. 나뭇잎이 바람에 날리며 그 사이로 햇살이 부서지는 걸 보고 있는 느낌.

배정윤작가

며칠 전, 소설 수업의 마지막 날이었다. 마지막 수업을 마치고 우리는 선생님과 모여 앉아 차를 마셨다. 두 달이나 한 교실에서 수업을 듣고 서로의 과제를 합평했지만, 그래서 목소리는 익숙했지만, 마스크 벗은 얼굴은 처음이었다. 나이도 직업도 서로 달랐지만, 자기 안에 쓰고 싶은 이야기가 있는 사람들의 눈동자는 제각각 다른 색으로 빛난다는 걸, 그들의 얼굴을 보고 알았다.

이 수업을 등록했던 건 약간의 도전이었다. 한창 바빴고, 무언가 새로 배우는 것은 조금 낯설었다. 하지만 마음의 방향을 조금 더 믿어보기로 했다. 첫 번째 과제 합평 때 손을 번쩍 들고 발표했던 기억이 난다. 밀린 일 때문에 1시간 만에 한 과제를 수업 직전 겨우 제출한 주제에 무슨 용기였는지 모르겠지만, 괜히 해야만 할 것 같았다. 입 다물고 조용히 있으려고 온 곳은 아니었으니까. 그 날 뜬금없는 판타지 요소로 선생님을 당황시켰던 나는 마지막 모임에서도 이 스토리로 책 몇 권짜리 대서사를 쓰겠다는 겁 없는 소리를 해서 또 선생님을 당황시켰다.

긴 글을 쓰는 게 만만치 않은 일이라는 건 안다. 나는 고작 160페이지를 쓰는 데에도 1년이 걸렸으니까. 하지만 처음의 마음이란 그런 게 아닐까. 거침없이 빛나고 무모할 정도로 생기 넘치는 것. 부딪히고 넘어져서 조금은 빛바랠 수도 있지만, 그래도 괜찮을 거라고 생각한다. 10년 전만 해도 넘어지면 거기서 일어날 수 없는 줄 알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은 지속되고, 세상은 아무렇지 않게 돌아가고, 심지어 내가 넘어진 걸 남들은 딱히 신경도 쓰지 않는다는 걸 이제는 안다.

최근 몇 년 간 처음 해 본 일이 많다. 그리고 작년부터 지금까지는 겁이 나서 못했던 처음의 일들을 더 많이 시작했고, 의외로 괜찮았고, 어떤 것은 잘 해냈다. 생각 같지 않았던 것도 있지만, 그래도 이제는 전처럼 처음이 두렵지 않다. 오히려 여전히 처음 할 수 있는 게 가득 남아 있어 기쁘다.

누군가 물었을 때 답했던 것처럼, 비평을 쓸 때는 차곡차곡 탄탄하게 구성해가는 쾌감이 있다면, 소설을 쓸 때는 생이 일렁인다. 첫 단편을 썼던 날 깊은 새벽에 살아있다는 감각을 느꼈다. 그리고 두 달 전 첫 수업에 다녀오던 날 벅찼던 마음도 기억한다. 그래서 내 일의 다른 한 축은 이것이었으면 좋겠다고, 그래야만 하겠다고 결정했다. 아직 트리트먼트도 완성하지 못한 주제에 이렇게 쓰는 것은 다이어트 다짐을 널리 알리는 것과 비슷한 마음가짐이다.

첫 개인전을 이뤄낸 작가들의 그림이 앞으로 계속해서 빛났으면 좋겠다. 넘어지고 부딪히고 작업이 막혀서 많이 아픈 날이 있더라도, 그걸 잘 다듬어 더 복잡하고 아름다운 고유의 빛을 만들어낼 거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며칠 전 반짝이는 눈으로 이야기를 나눴던 사람들도, 자기 안의 이야기를 꼭 끝까지 완성했으면 좋겠다. 또한 내 눈도 그들처럼 처음의 마음으로 빛나고 있기를, 그게 되도록 오래, 멀리 지속되기를 바란다.

그리고 이 긴 글을 여기까지 다 읽어준 당신도, 생기 넘치는 처음의 마음을, 무엇으로든 하나 품을 수 있기를. 그리하여 이 계절이 더욱 빛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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