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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ophy Nov 01. 2020

기대는 삶

어깨와 어깨를 맞대고,

최근 여행의 추억을 자꾸 떠올리는데, 오늘은 친구와 사흘간 원 없이 걸었던 제주 여행이었다. 서로의 끝없는 바보스러움과 악함까지 용납하는 사이인 우리는 걷다가 힘들고 배고프다고, 문득 저거 예쁘다고, 됐고 이거나 해보자고, 내키는 대로 행동했다.


둘째 날 제주 막걸리를 마셨고 방바닥은 너무 따뜻해서, 살짝 누웠다가 일어날 수 없었던 나는, 친구한테 칫솔에 치약 좀 짜서 달라고 질척였다. 친구는 네가 대체 인간이냐고 하면서도 칫솔을 가져다가 입에 넣어 줬고, 나는 누워서 이를 닦다가 사레들려서 또 욕을 먹었다. 우린 그날 밤새 웃었다.

그 친구 앞에서 난 뭔가를 잘할 필요도, 멋질 필요도 없다. 있는 그대로의 내가 그 아이에게 용기이자 위로라는 사실을 안다. 그가 내게 너무도 그렇기 때문이다. 우리는 서로에게 너무나 평범하디 평범하고 심지어 어리석은 인간이자 동시에 소중하게 빛나는 사람이다.

어른이 된다는 건 도달할 수 없는 이정표지만 그나마 어른의 길목에 들어섰다고 느꼈던 건, 내가 보통 사람이라는 걸 알게 된 순간이었다. 남들만큼 평범하고 딱히 잘날 필요도 없는 사람. 잘해서 특별한 게 아니라, 그저 내 빛깔로 달라서 특별한 사람. 그걸 모를 땐 폐 끼치지 않으려 혼자 애쓰고, 기대야 할 거 같으면 마음을 닫고, 차라리 누가 내게 기대는 게 편했다. 그러나 나는 사실 혼자 짊어질 만큼 대단한 인간이 아니었다. 누구라도 마찬가지다. 자신을 짓누르고 타인에게 기회를 주지 않는 건, 내게도 타인에게도 옳은 방식은 아니었다.

비슷한 이유로 얼마 전 친구에게 이런 얘기를 했다. 이상형 같은 거 만들어두지 않을 나이지만, 누군가를 만난다면 애쓰게 하지 않는 사람이면 좋겠다고. 마음을 가늠하기 위해 애쓰게 만들지 않는 솔직한 사람, 내가 혼자 애쓰도록 내버려 두지도 않고, 반대로 자신도 너무 애쓰지 않고 내게 기댈 줄 아는 유연한 사람이면 좋겠다고. 어떤 관계든 서로를 위해 노력할 필요는 있지만, 혼자 고군분투하며 애쓰는 건 결국 두 사람 모두 건강하지 못하게 만든다.

그래서 요즘은 가족과 친구, 동료에게 조금 더 서슴없이 기대려 노력한다. 때론 예전의 나라면 불가능했을 만큼 뻔뻔하게 기대 본다. 그렇게 기대면서 내 곁의 타인이 생각 이상으로 강하다는 걸 느낀다. 혼자 짊어지고 버티려는 건 책임감이 아니라 나만 강하다는 오만이다. 우리는 서로를 향해 기대며 교차할 때 더욱 쉽게 무너지지 않는다. 가까운 이들은 물론이고, 오늘 잠깐 만나 몇 마디 나눈 사이일지라도 그 대화의 무게만큼은 서로 마음과 삶을 기댈 수 있다.

어제 함께 요가하는 동료와 그런 얘기를 했다. 과연 되겠나 싶은 동작을 할 때도 포기할 수 없는 건 바로 옆사람 때문이라고. 저 사람이 포기하지 않는 덕분에 나도 지금 버티는 거고, 반대로 내가 포기하면 저 사람도 포기하고 싶을 테니, 절대로 포기할 수 없다고. 각자 다른 이유로 모인 우리는 몸과 에너지만으로도 서로에게 기댈 자리가 되어 주고 있었다. 보이지 않아도, 공기가 서로를 연결하고 지지한다. 그리고 나는 매주 하루씩, 내 삶의 몇 그램쯤 그들에게 기대며 힘을 얻는다.

외부에 기댄 만큼 삶은 가벼워지고 나는 조금 더 자유로워진다. 그렇게 힘을 빼고 남은 에너지는 오히려 타인을 향해 사용한다. 그들이 또 내게 기대면서 자신이 짊어진 무게를 덜어낼 수 있도록. 거미줄처럼 얽힌 우리의 관계는 가늘어서 잘 보이지 않더라도 매우 촘촘하고 넓게 세계를 지탱한다.

나의 요가 선생님 권금은 겨드랑이가 패인 모양이 사람의 어깨와 같다고, 우리는 처음부터 서로 어깨와 어깨를 연결하도록 만들어진 존재일지도 모른다고 했다. 우리의 몸이 그렇게 생긴 것처럼, 나는 애쓰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나인채로, 그도 내 앞에서 자기 자신인 채로, 모두 솔직하게 어깨와 어깨를 연결하며 마침내 마음까지 기댔으면 좋겠다.

매번 뜬금없이 풀어놓는 긴 글을 읽는 당신도 어쩌면 나와 닮은 점이 있으리라 생각한다. 그러니 당신에게도, 마음 한 구석쯤은 아무렇게나 풀어놓아도 아무 일 일어나지 않으니 괜찮다고, 기대는 삶은 약한 게 아니라 더 강한 거라고, 조금은 주변에 기대면서 당신의 무게를 가볍게 했으면 좋겠다고 말해주고 싶다. 그리고, 때때로 당신이 기대는 사람이 나라도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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