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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ophy Nov 01. 2020

여름, 헤매는 감각

괜찮지 않은 날에도 다정하고 싶다

여름이 되면 소설 《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의 첫 장면을 떠올린다. 무라이 설계 사무소의 사람들은 여름마다 해발 1000미터가 넘는 고지에 위치한 기타아사마 아오쿠리 마을의 별장에서 함께 모여 일한다. 이른 아침 덧문을 열어 환기를 시키면 여름 별장의 내부에 숲의 공기가 흐르고 졸참나무로 만든 반질반질한 바닥에는 조심스레 아침의 빛이 든다. 돌아가며 아침 식사 준비를 하고, 차분한 가운데 식사를 마치면 연필 깎는 소리가 사각사각 들린다. 일과의 시작이다.

책 속에서 무라이 설계 사무소 사람들은 미술관 설계 경합을 준비하는데, 경합의 스케일에 비해 준비 과정은 딱히 화려하지 않다. 소설은, 누가 바라봐주지 않아도 결과를 이뤄내지 못해도 정진하는 감각을 전한다. 아무래도 내게 여름이라는 계절이 주는 감각이 그래서인지, 나는 여름이 짙어지면 이 소설에 감도는 분위기가 자연스레 떠오른다.

햇살이 한없이 빛나고, 뜨거운 공기와 무성한 초록으로 가득 차 있지만, 여름마다 그 꽉 차도록 분주한 가운데서 나 혼자 그대로 멈추어 있는 기분이 든다. 계절은 차올랐는데 내 손에는 아직 아무것도 없어서 가을이 오기 전까지 버텨야 한다. 이상하게도 매번 마음의 근력이 필요한 계절이다.

대체로 잘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때로는 어디로 가는지 잘 보이지 않거나, 이대로 있어도 될지 걱정되는 날도 있다. 회복이 빠른 편이라 부딪히길 두려워하진 않지만, 알 수 없는 이유로 벽에 부딪히는 감각은 몇 번이라도 익숙해지지 않는다. 그래도 어쨌든, 괜찮지 않은 날에도 다정하고 싶다.

오늘은 S와 저녁 메뉴, 양파 플레이크, 푸드 바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다가 방향이 산으로 흘렀다. S는 내가 수심 깊은 곳으로 한없이 내려갔다가도 스스로 올라올 수 있고, 반대로 수면 위에서 가볍게 떠다닐 수도 있는, 존재하는 갭이 큰 사람이라고 했다. 너를 건져 올려줄 사람은 필요 없지만, 그렇다고 더 깊은 곳으로 끌어내리는 사람은 만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했다. 케이스 스터디가 부족한 나는, 매번 S의 조언을 듣고도 분간을 못하지만, 그래도 깊은 애정이 묻어나는 이야기를 들으며 마음을 기대는 시간이 좋다.

요즘 친구들의 참견이 부쩍 늘어났는데, (가끔은 얘들이 팝콘 먹으며 1열 관람 중인가 싶기도 하지만) 어떤 방향으로든 내 행복을 바라며 진심 어린 애정을 보태는 친구가 많은 건 든든하고 기쁜 일이다. 내가 따져봐도 나는 이상한 점이 많은데, 모두들 나의 이상한 점을 각자의 방식으로 걱정한다. 나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서로를 향한 애정과 걱정을 보태며 상대의 방향으로 한 뼘 더 넓게, 멀리, 선명하게 존재한다. 그 정도면 여름을 버티기에 충분하다.

어젯밤엔 맨다리를 쭉 뻗어 보았더니, 발목을 경계로, 그리고 다시 무릎 즈음을 경계로 피부의 색이 나뉘어 있었다. 잘 타는 피부라 꼭 이렇게 여름이 흔적을 남긴다. 하지만 가을이 되고 겨울이 되면 또 흐려질 것이다. 오늘 밤엔 다시 억수 같은 비가 쏟아진다. 늘 그랬듯이 불필요한 것들은 시간이 지나면 알아서 씻겨 내려간다. 이렇게, 벌써 여름이 반이나 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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