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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ophy Jan 11. 2021

재능이라는 것

하고자 하는 마음을 모아서

얼마 전 아모레 미술관에서 오래된 자수 병풍과 도자기를 보며 느꼈던 건, 예쁜 것은 시대를 뛰어넘어 예쁘다는 사실. 그건 만든 사람의 재능이 그만큼 뛰어나고 자기만의 색깔이 강하기 때문이겠지만, 사실 더 중요한 건 그 아래 감춰진 어마어마한 노력과 정성이라고 생각했다.

뛰어난 재능도 물론 중요하다. 출발선이 빠를 수 있으니까. 하지만 재능이 중요한 일을 하며 깨달은 사실은 가진 것을 갈고닦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거였다. 빛나는 재능도 채우지 않고 계속 써버리면 결국 바닥이 나고, 반대로 제대로 쓰지 않고 방치해두면 빛이 바랜다. 대부분의 일은 재능만으로 해낼 수 없다.

영화 <댄서>에서, 천재 발레리노 세르게이 폴루닌은 타고난 재능을 가지고 높이 높이 올라갔다. 그렇지만 너무 쉬웠기에 소중히 여기지 못했다. 더 위로 올라갈 곳이 없게 되었을 때, 그는 춤추는 이유를 알지 못해 방황하다가 결국 은퇴 무대를 기획한다.


그런데 자신의 창작 안무로 마지막 무대를 꾸리고 진심을 다해서 춤을 춘 그는, 아이러니하게도 거기서 다시 춤을 출 힘을 얻는다. 끝내기 위한 무대에서 다시 해야 하는 이유를 찾은 것이다. 이유는 타고난 재능이나 그에 걸맞은 자리와 명예에 있는 게 아니었다. 그건 결국 이걸 해야만 살아있다고 느끼는 자기 마음속에 있다. 이유가 있다면 결론은 충분히 만들 수 있다.

끊임없이 자기 안의 이야기를 찾아내고, 좋은 건 골라내고 불필요한 건 솎아내고, 남은 것을 잘 모아 정돈해서 갈고닦고, 그걸 사용해서 정성스레 무언가를 만들고, 비면 다시 채우고, 반복하고 지속하며 마음이 흔들리면 다잡는다. 그런 정성과 노력은 시간이 흐르면 결국 재능이 된다. 누구나 알지만 실천은 어렵기에, 우리는 쉽게 타인의 재능을 부러워한다. 그건 나를 위한 변명일지도 모른다. 저 사람의 타고난 재능이 결과를 이뤄냈을 거라고 편하게 믿고 싶은 거다.

물론 알면서도 가끔 겁이 난다. 어쩌면 아무것도 모를 때보다 더. 내 이야기의 구멍이 자꾸 눈에 띄고, 내가 지은 집은 곧 무너질 듯 위태로워 보인다. 매일 이렇게 약한 마음의 반복인데, 과연 이 구멍들을 잘 메우고 더 큰 집을 지어낼 수 있을까. 어떤 날은 친구들과 앉아 찰스 부코스키의 말을 빌어, '망할 놈의 예술을 한답시고' 뭐 하는 건지 한탄한다. 그런 날은 이유 없이도 동력이 되어 주는 대단한 재능이 아쉽고 부럽다.

하지만 누가 그랬다. 재능은 하고자 하는 마음이라고. 크지 않은 재능이라도 마음을 밀어붙여 갈고닦으면 작더라도 빛나는 것이 된다는 얘기가 아닐까 생각했다. 누군가는 타고난 재능이 좋아서 적당한 마음만을 갈고닦아 금방 보석을 만들기도 하고, 누군가는 큰 마음을 가지고도 너무 작은 재능을 반복해서 갈고닦다가 결국 다 갈아내고 아주 작은 결정만 손에 남을 수도 있다. 하지만 오래 지속한 것은 또 그것대로 깊고 진한 빛이 난다. 가장 화려한 것이 좋다는 법은 없으니까. 그러나 오래 지속하려면 거기엔 역시나 이유가, 그것도 스스로 깨달은 이유가 있어야 한다.

그런 면에서 어쩌면 누구보다 성실해야 하는 직업이 예술가가 아닌가 생각했다. 타의가 아니라 자의에 의한 최대의 성실을 가져야 하는 사람들. 그렇게 지속해서 남긴 것이 언젠가 시대를 뛰어넘는 아름다움이 된다. 역시나 재능만으로 되는 것은 없다. 물론 아직은 당장 오늘의 것이 누군가의 마음에 닿았으면, 하고 바라는 입장이라 너무 머나먼 이야기지만. 그래도 가능하다면 오랫동안 잘하고 싶다.

사주를 다 믿는 편은 아니지만 어떤 말들은 유난히 기억에 남는다. 누군가의 생사를 결정하는, 칼을 쓰는 사주라고 했다. 글을 쓰는 것도 같은 의미라며. 이왕 날카롭게 써야 한다면 그것으로 무언가를 찌르더라도 누굴 죽이는 대신 살리는 쪽을 택해야겠다고, 날카롭게 찔러서 숨구멍을 터주는 글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니까 날카롭지만 다정하게 쓰고 싶다. 그리고 단단하게. 그러려면 오래 지속해야 할 테고, 체력과 지구력, 버티는 용기가 필요할 테다.

어떻게 쓸지 헤매는 나날 속에서 약한 마음을 반복하는 미숙한 사람이지만, 그 약한 마음이라도 매일 모아 보기로 했다. 얇은 종이도 수없이 쌓이면 눈에 보이듯이, 약한 마음도 계속 쌓이면 종이 한 묶음쯤은 되지 않을까. 그러면 조금 먼 어떤 날엔 날카롭지만 다정하게 쓰는 순간을 맞이할 수도 있겠다. 그리고 그렇게 맞이한 날카롭지만 다정한 것, 그게 글을 넘어서 나 자신이어도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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