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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ophy Jan 13. 2021

정해두지 않았을 때 오는 것들

새롭게 발견하는 순간들

그 날은 아침부터 숲의 묘지를 산책하고, 시립도서관에 들렀다가 저녁에 보트를 탈 예정이었다. 흐리고 비 오는 10월의 스톡홀름은 한겨울 같았다. 그대로 배를 탔다간 둘 중 하나는 감기에 걸릴 것 같아 숙소로 돌아가기로 했다. 아마 혼자였다면 무리해서 예정대로 움직였을지도 모르겠다.

침대에 누워 잠시 쉬면서, 엄마는 나와한 여행을 세어 보았다. 모든 여행이 꿈같았다고, 남은 인생에 별다른 이벤트는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네가 있어 이런 곳에도 와본다고, 고맙다고 했다. 그 고맙다는 말 한마디에 모든 것이 사르르 녹았다. 매번 가까운 사이가 가장 어렵게 느껴지지만, 사실 가까운 사이에 필요한 것이야말로 아주 심플한 말과 행동이다.

얼마 간의 시간이 흘렀다. 엄마는 고단했는지 깊이 잠들었고, 나도 오늘은 그냥 이대로 쉬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커튼을 치려다 슬쩍 내다본 하늘은 나가야만 하는 색깔이었고 곧바로 엄마를 깨워 밖으로 뛰어 나갔다. 스톡홀름에 오길 잘했다고 생각되는, 선물 같은 노을이었다.


우리는 해가 지는 방향으로 걸으며 하늘의 색이 변하는 순간을 감상하다가, 저녁을 먹기 위해 다시 해가 지는 반대 방향으로 걸었다. 뜬금없이 벨기에 식당이었지만, 거기서 마신 맥주는 여행 일정을 통틀어 가장 맛있었다. 엄마는 아직도 틈만 나면 그 맥주 맛을 얘기한다.

그 날 나는 숙소로 돌아오며 예정된 계획을 한번 수정했고, 창 밖의 하늘을 보고 다시 한 번 마음을 바꿨다. 원래 계획을 그대로 실행하는 편이었는데, 그렇게 갑자기 내린 결정들이 마법 같은 순간을 가져다줬다. 좋은 결정의 타이밍은 오랜 숙고보다 직관에 의존할 때가 정확하다. 충동이 아닌 직관. 그건 과거를 되짚거나 미래를 준비하기보다, 지금 현재를 온전히 감각하며 살 때 가능한 일이다.

요즘엔 무엇이든 되도록 정해두지 않으려고 한다. 예전에는 나를 정의하는 질문에 쉽게 답했다. 나 자신, 원하는 것, 취향을 정확히 알고 있다고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시간이 지나 보니, 단어나 문장으로 규정하고 닫아 두기에 사람은 너무 복잡하고 입체적이다. 오늘의 기분에 어울리는 것, 지금 하고 싶은 것은 점점 더 확실히 고를 수 있는데, 그것을 한 가지로 대답해야 하는 순간은 점점 더 어렵다. 삶이 그렇게 납작하지만은 않아서. 그렇지만 역설적이게도 요즘 들어 선명한 사람이라는 말을 더 많이 듣는다. 삶에서 가장 중요한 몇 가지가 간결해졌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작은 것들은 몇 번을 바뀌어도 상관없다.

그래서 '어쩌면'과 '만약에'에 삶을 기대는 순간이 많아졌다. 중심이 확실하되 외부에 대해서는 정해둔 것이 없을 때 예상치 못한 좋은 것들을 만난다. 여행 일정을 무리하게 소화하길 포기하고 대신 숙소에 누워 엄마에게 따스한 말을 들었고, 창 밖의 풍경을 꼭 보아야겠다는 확신으로 누워 있길 포기하고 갑자기 뛰쳐나갔을 때 환상적인 하늘을 만났다. 그건 우리가 편안하고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것이 가장 중요한 목적임을 알고, 순간에 유연하게 대응했기 때문일 테다.

가끔 오작동하는 날도 있지만 대체로 '어쩌면'과 '만약에'가 정방향으로 잘 작동하는 나날이다. 마음을 열어 두고 주변의 세상을 탐구하다가 새롭게 좋아할 수 있는 것들을 발견하고, 타인과 우연히 연결되고 같은 결을 읽어내는 눈을 마주치고 서로 선의와 진심을 건네고, 그리하여 다음에 올 '어쩌면'과 '만약에'를 다시 믿어 본다. 열심히 계획하고 정해두며 스텝을 밟아 온 시간보다 오히려 지금이 더 벅차다. 정해둔 것이 없는 내일이, 거기 있을 내가, 지금과 다른 것을 발견할 순간이 자꾸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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