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Sophy Jan 13. 2021

오래 볼수록 더 궁금한

타인의 세계

우리는 그날 마음에 길이 트이는 순간에 대해 이야기했다. 아주 가까운 언젠가의 나는, 마음속에 타인에게 향하는 길이 전혀 없다고 느꼈었는데 어느새 마음이 흘러 흘러 길을 만들었다. 친구에게 문득 물었다. 혹시 너도 <비포 선라이즈> 시리즈 좋아하냐고.

영화 <비포 선라이즈>에는 이런 대사가 있었다. 누군가에 대해 모든 걸 알게 되었을 때, 그제야 진짜 사랑에 빠질 수 있다고. 처음 그 영화를 보았을 때 사랑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지만, 왠지 그 부분이 좋았다. 지금도 그 부분이 좋은 것을 보면 사람의 어떤 부분은 크게 바뀌지 않는가 보다. 하지만 예전과 다르게, 이제는 무슨 말인지 알 것 같다.

한 인간의 과거-현재-미래, 그가 쌓아 온 다층적인 삶의 레이어를 한 겹 더 알게 될 때, 표면을 보고 그저 좋아진 것과는 다른 깊이의 애정이 생겨난다. 사랑뿐 아니라 모든 관계에서 누군가를 보는 눈빛이 깊어지는 건 그런 순간들일 테다. 한 사람을 안다는 것은 그렇게 애틋하면서도 깊어서 두려운 일이다.


그렇지만 나는, 누군가를 그렇게 탐구해본 사람들을 사랑한다. 표면만 살짝 훑어본 것보다 타인을 깊이 탐구하고 이해하고 깊이 바라본 순간을 가졌던 이들. 그것이 사랑일 때는 더더욱.

감정의 흐름이 원하는 대로 정방향일 때는 흔치 않다. 하지만 그렇게 감정이 접히고 꺾여 본 뒤에도 왜곡된 채로 멈추지 않고 정반합의 과정을 통해 나름의 성장을 이루는 과정은 분명 가치 있다. 한 번도 마음이 구겨져본 적 없거나 그저 구겨진 채로 남은 사람보다, 구겨졌다가 스스로 펴낸 사람이라면 어떤 순간에도 믿을 수 있다.

오래 전의 어떤 노래에, 한 번쯤은 실연에 울었었던 눈이 고운 사람을 원한다는 구절이 이제는 이해가 갈 것도 같다. 누군가를 사랑했던 흔적을 때론 그림자라고 생각하지만, 한편으론 누군가를 품었던 만큼 마음이 성장해서 타인을 바라보는 시선이 더욱 고와진 사람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으니까.

어릴 때 봤던 만화(아마도 유시진의 <쿨 핫>... 이거 알면 80년대생)에서 '사람과 사람이 만나 사랑에 빠지는 것은 우주와 우주가 만나는 대 이벤트'라는 대사가 오랫동안 기억에 남았다. 유치할 수도 있지만 나는 아직 이 말을 믿는다. 사람은 하나하나 너무도 깊고 복잡한 우주다. 서로 다른 두 우주가 만나서 인연을 맺는 것은 그래서 흔치 않은 이벤트일 수밖에 없는 거다.

누군가 그런 얘기를 했었다. 다른 사람과 처음의 재미있는 걸 다 해봤다면 나와의 연애는 재미없지 않겠느냐고. 그때도 지금도 동의할 수는 없다. 연애 초기의 설렘과 재미야말로 누구를 만나도 느낄 수 있지만, 사람을 만나는 건 그렇게 단순한 재미가 아니다. 하나의 세계를, 우주를 만나고 탐구하는 일이므로 오히려 처음보다 시간이 지날수록 더 깊고 재미있을 일이다.

태도에 일관성 있는 사람을 무척 좋아한다. 그러나 그보다 더, 모르는 것을 낯설어하기보다 호기심을 갖고 알기 위해 노력하는 유연한 사람을 좋아한다. 나도 누군가에게는 처음 보는 다른 세계라는 것을 알고 있으므로, 타인의 세계를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과 함께 있을 때 비로소 나도 안전하다는 느낌이 든다.

마찬가지로 내게도 타인의 세계란, 몰라서 두렵지만 그럼에도 늘 알고 싶은 곳이다. 누군가는 그런 궁금함을 끌어내기 위한 신비감을 이야기하지만 딱히 의미 없다고 생각한다. 그런 것 없이도 궁금해할 사람은 끝없이 궁금해한다. 사람을 향한 궁금증에는 정량이 없다. 누군가를 다 안다고 여기는 건 진짜 다 아는 게 아니라 탐구하길 멈추고 판단 내려 버렸기 때문이다.

꼭 마음에 드는 노래가 있으면 질릴 때까지 듣는 편이다. 듣다가 처음과 다른 부분에 꽂히고, 한참 다시 듣다가 또 다른 가사가 좋아지고, 어떨 때는 멜로디가 꺾이는 부분이 좋아서 수없이 반복해 듣는다. 같은 노래도 계속해서 다시 발견하는 맛이 있다.


사람도 그렇다. 아니, 그렇지 않을 이유가 없지 않은가. 노래보다 인간이 더 복잡하고 다채로운 존재인데. 그래서 나는 자꾸 들여다보고 싶어 진다. 나도, 당신도, 우리는 탐구할수록 더 깊이, 오랫동안 궁금하고 흥미로울 존재이므로.

대책 없다 놀리는 사람도 있지만, 다 바뀌어도 사람의 중심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 예전엔 그런 줄도 모르고 살았다면 이제 알면서도 그렇게 사는 것뿐. 이런 내가 딱히 싫지는 않다.


그러니까, 누가 말릴 수 있겠어요, 이런 마음을.

작가의 이전글 아주 커다란 원을 그리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