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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ophy Jan 13. 2021

사소해서 더욱 커다란

'우리'가 되는 방법

오후 내내 인터넷 가입으로 전화 씨름을 한 엄마는, 지난한 통화에 지쳤음에도 상담 후 평가에서 만점을 줬다고 했다. 어쨌든 고생했을 누군가의 아들, 딸의 마음이 뭉개지지 않았으면 했다고, 말 몇 마디로 박하게 굴고 싶지 않았다 했다.

그래서 나는 오늘 무려 6개의 고객센터와 통화하면서 좋은 하루 되시라는 상담사의 마지막 멘트가 끝날 때마다 '감사합니다, 수고하세요.'를 덧붙였다. 엄마의 이야기가 생각났기 때문이다. 그러자 처음의 유려한 멘트와 달리, 약간 어색한 웃음과 고맙단 말이 다시 돌아왔다.'상담사 000' 중 앞에 통화한 이가 '상담사'였다면, 나와 인사를 나눈 이는 '000'님 쪽에 가까웠다. 작은 틈으로 그제야 진짜 사람이 보였다.

집을 작업실로 쓰느라 평소엔 문을 닫은 채 일하거나 바쁘게 오간다. 같은 집에 있지만 엄마와 밥 먹는 시간도 다르다. 매번은 아니지만 그래도 오가며 기억날 때마다 밥은 먹었는지, 뭘 먹었는지 물으려 한다. 서로 쓸데없는 농담을 걸고 괜히 웃는다. 그런 사소함이 있어야 관계가 유지된다는 것을 서로 알기 때문이다.

서로가 맞닿은 천 조각이고 관계가 그걸 잇는 바느질이라면, 이런 사소함은 끝 단의 오버로크라던지 단추를 단 실 같은 거다. 더 섬세하게는 투명한 실로 마무리한 얇은 블라우스 소매 같은 것. 그 사소한 것들이 없어도 옷의 형태는 유지되지만, 끝 단이나 단추가 다 떨어지면 옷은 너덜너덜해져 제 기능을 못하고 만다.

오랫동안 공부하며 실패를 거듭하던 때, 한 친구는 헤어질 때마다 꼭 긴 팔로 안아줬다. 정작 힘내라는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복잡다단한 힘듦을 차마 밖으로 꺼내지 못한 날에는 헤어질 때 안아주는 따스함에 돌아서며 살짝 눈물이 났는데, 어쩐지 말하지 않아도 다 말한 것 같았다. 물론 그렇게 힘내야만 할 필요 없는 지금도 종종 안아주는 친구지만, 그때는 아주 사소한, 그러나 사람들이 쉽게 하지 않는 그 행동이 그렇게 힘이 됐다.

나의 요가 선생님은 요가를 마치고 헤어질 때 꼭 한 번씩 안아 준다. 처음에는 어쩐지 낯설었는데, 요즘엔 내가 먼저 다른 친구들을 안아 주게 됐다. 오래전 친구의 인사가 위로가 된 날이 기억나서, 서로의 안부를 나누는 사소한 행동이 어떤 날은 대단한 위로가 될 수 있음을 알기에, 그게 아니더라도 그냥 좋아서. 서로를 생각하는 마음은 대단한 행동이 아니라 오히려 사소함에서 전해진다.

그래서 사소한 이야기를 기억하고, 사소한 약속을 지키고, 사소한 행동을 한다. 가끔은 사소한 것들이 마음에 걸린다. 아무것도 아닐 때도 있지만 엄청난 것일 때도 있기 때문이다. 누군가와 가까워지는 계기도, 누군가를 멀리 떠나보낸 뒤에 남는 것도 사실 아주 사소한 것들이다. 또한 해주지 못해 후회되는 것 역시 아주 작은 것들이었다. 다만 크기가 작을 뿐, 딱 그 순간 해야만 했던 것임을 이제는 안다. 그 사소함을 전하는 순간을 놓치고 싶지 않다. 기다릴 수도 없고 참거나 숨겨서도 안된다. 작으면 작을수록 더더욱 그 순간뿐이기 때문이다.

엊그제 윗집에서 아기가 뛰어 미안하다며 귤과 크리스마스 카드를 가져왔다. 처음 본 사이라 서로 어색하고 부끄러웠지만, 그런 마음 표시로 우리는 서로에게 서로가 된다. 머리 위의 소음이, 이름이 있는 아이가 된다. 마음대로 밖에 나가지 못해 답답하고 심심한, 한창 에너지가 넘치고 호기심이 많을 어떤 꼬마 아이. 먼저 어색함을 견디고 말을 건네준 것처럼, 나도 뭔가 말을 건네고 싶었다. 조금 뛰어도 괜찮다고, 그저 건강하게 자라라고. 이름을 알게 된 그 아이에게 전해 줄 크리스마스 선물이 뭐가 좋을지 고민 중이다. 늦지 않게, 전하고 싶다.

사람의 마음은 때때로 물먹은 도화지 같다. 쉽게 찢어지고 자주 가라앉으며, 조금만 물감이 튀어도 꽤나 빨리, 크게 번진다. 쉽게 지울 수도 없다. 이미 수채화 물감이 묻은 뒤에는 문지를수록 종이가 벗겨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반대로, 제대로 찍은 진한 물감은 물먹은 도화지 위에서 금방 범위를 넓히며 예쁜 그라데이션을 만든다. 그러니까, 작지만 진한 표현은 우리의 약한 마음에 널리 번진다. 그렇게 사소함이 사소함이 아니게 쓰일 때 우리는 서로가 보이고 진짜 '우리'가 된다.

그래서 오늘 만나는 당신의 사소함을 한 번 더 기억하고 사소한 행동을 건네려고 한다. 조금 뜬금없더라도, 오늘이 아니면, 지금이 아니면 안 된다는 생각에 건네는 것이니 기쁘게 받아 주기를. 그리고 가능하다면 당신의 사소함을 내게도 건네주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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