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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ophy Mar 10. 2021

허들을 올릴 때

더 나아지기 위해, 내가 선명해지는 시간

매일 아침 숫자를 확인한다. 별일 없어 보이는 일상의 어디에든 불안이 깔려 있다. 모르는 척하고 싶지만 걸음마다 바스락거리며 밟히는 불안이 자꾸 귓가를 건드린다. 이런 와중에 무탈하게 일할 수 있고, 심지어 딴 데 기웃거리지 않고 쓰는 일만 지속하는 건 행운이다. 욕심부리지 말자고 생각할 것도 없이, 딱히 욕심이 더 나지 않는 날들이다.

하지만 얼마 전엔 다른 사람의 글을 읽고 문득 더 잘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릴 때부터 경쟁심으로 괴로워하는 타입은 아니라서, 나보다 잘한 걸 봤다고 꼭 이기고 싶은 마음이 들지는 않는다. 다만 마음을 울리는 특별한 점, 그러니까 내가 가지지 못한 특징이 보일 때 슬쩍 그런 마음이 고개를 든다. 요즘처럼 내게 부족한 점이 확실히 눈에 띄기 시작했을 때는 더더욱.

최근엔 자원이 모자란 느낌이라 더 읽고 채우고 연마해야겠다는 생각이 계속 든다. 소모당하고 싶지 않아서 과거의 어떤 것들과 결별했지만 그렇다고 스스로 소모하고 싶은 것도 아니었다. 텅 비기 전에 나를 좀 더 키우고 채워야 한다는 강박으로 가을 무렵부터 마음이 조급했다.

전 같으면 부족한 나를 자책했겠지만, 이번에는 어렵게 받아들이지 않기로 했다. 지금까지 해왔던 것과 비슷하게 하고 있는데 부족하다고 갈증을 느끼는 것은 어쩌면 더 나아질 채비를 하는 거라고, 또 비었다는 생각이 들만큼 많은 걸 했다는 증거가 아닐까 하고.

그림을 그릴 때도 그랬다. 막연하게 그리다가 어느 날 문득 눈에 들어온 단점을 고치거나 장점을 키우고 나면 한 뼘 더 성장해 있었다. 장단점이 보인다는 것은 보이지 않을 때보다 성장했다는 뜻이고, 또한 안갯속으로 다시 나아갈 때가 되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사실 이런 기회를 취할지, 모르는 척 덮고 넘어갈지는 강제가 아니라 선택의 문제다. 시간과 체력, 또는 다른 무엇에 쫓겨서 궁지에 몰리다 보면 어떤 날은 못 본 척 슬쩍 넘어가고 싶을 때도 있다. 하지만 보이지 않는 척하면 어느새 정말 보이지 않게 된다. 익숙해지면 같은 기회는 다시 오지 않는다. 수정과 성장의 기회가 앞으로 영영 없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무뎌진 사람들을 본 적이 있다. 나중에 후회하고 싶지 않다.

지난가을 어느 작가의 전시 서문을 쓰기 위한 인터뷰에서 작가는, 그림이 바뀐 것은 자신이 바뀌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림과 자신은 하나라서 같이 성장할 수밖에 없다고. 나도 아마 같은 부류일 테다. 더 나은 글을 쓰고 싶고, 그러기 위해서 내가 좀 더 나아지고 싶다.

사소한 데서 장난으로 경쟁 욕을 부리는 것과 달리, 정작 삶의 중요한 부분에선 경쟁심이 없다. 다만 나에게 나를 증명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래서 글이든 삶이든 자신을 대하는 기준이 너무 높은 것 아니냐는 이야기를 종종 듣는다.


실제로 예전엔 그 기준으로 나를 밀어붙이고 괴롭히다가 나가떨어지곤 했다. 끝에는 꼭 기준에 미달된 나를 탓했다. 하지만 삶이 느슨해진 지금은 더 이상 나를 괴롭히거나 탓하지 않는다. 대신 기준은 굳이 버리지 않으려 한다. 나아지기 위해 조금씩 허들을 높일 때 도약하는 힘이 더 길러진다. 일이 아니더라도 뭐든.

단점이 만든 빈 공간만큼 허들을 살짝 올리고, 새로 알게 된 장점을 지지대 삼아 까치발을 들어 본다. 익숙하지 않아 자세가 흐트러지거나 금방 지칠 수 있다. 까치발을 들고 허들 너머를 훔쳐보는 시간이 생각 이상으로 길어질 수도 있다. 하지만 억지로 밀어붙이고 자책하는 대신 가만히 기다린다. 허들을 향해 되도록 높이 까치발을 들면서.

그렇게 기다리는 시간 동안 내가 가진 것들, 가지지 못한 것들이 뚜렷해진다. 내가 선명해지는 시간이다. 그렇게 기다리다 보면, 눈 앞이 뿌옇게 흐리다가 갑자기 단점과 장점이 눈에 들어오는 순간이 찾아온 것처럼 허들을 넘는 순간도 갑자기, 문득 찾아온다. 여러 번 그랬다.


그래서 기다리는 시간이 의심스럽지는 않다. 오히려 나에게 나를 증명하기 위해 필요한 시간이다. 언제일지 모르지만 천천히 허들 너머가 눈에 들어오고 가볍게 넘게 되는 순간, 또다시 안갯속으로 들어가는 날이 기다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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