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Sophy Mar 15. 2021

작고 보이지 않아도 거기 있는 것

미안하다는 말 이후에

헬싱키는 북유럽 여행 중 가장 편안한 곳이었다. 쾌가 많아서가 아니라 불쾌가 없어서였다. 낯선 여행지에선 문화적 차이로 인한 차별, 노골적인 자본의 그늘과 사소한 불친절까지 필연적으로 불쾌와 마주할 수밖에 없다. 감각적인 쾌가 이어지더라도 불쾌가 도로 위의 요철처럼 불쑥 얼굴을 내민다면, 그 여행지는 마냥 좋은 기억으로 남지 못했다.

헬싱키에 머무는 내내 도시의 물리적 구조와 무형의 시스템, 사람들의 태도가 물 흐르듯 편안하게 이어졌고, 그 흐름은 오디(oodi) 도서관에서 정점을 찍었다. 시내 중심가에 도서관을 지어버리는 패기, 아름다운 공간과 미래지향적 콘텐츠, 잔잔하고 고요한 가운데 세심한 질서와 배려까지.


그곳에선 휠체어를 타고도 도움 없이 책을 고를 수 있었고, 어린이와 어른의 공간이 분리되지 않았다. 한편엔 당당히 유모차 주차장이 있었다. 누구도 위화감이 없었다. 심지어 여행객이었던 나조차도. 이 도시를 떠받치는 견고한 질서 내에선 내가 어떤 누구여도 동등하게 안전하단 생각이 들었다. 그건 정치, 행정, 시민 어느 하나가 뛰어나서 이뤄진 게 아니었다.

작은 배려와 질서는 고루 성숙한 커다란 주체들이 치열한 조정과 합의 끝에 도출해내는 어려운 결론이다. 그래서 약자를 대하는 태도에서 그 사회의 격이 보인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어린이와 약자를 대하는 태도, 그러니까 동정과 연민으로 베푸는 시혜가 아니라 나와 다르지만 동등한 존재와 대화하고 연대하는 자세에서 세상을 대하는 한 사람의 인격을 본다.


아이를 키우는 한 친구는 "육퇴"가 너무 "일인칭적 단어"라 했다. 무심하게 쓰던 말이 아이를 대상화시켰단 걸 깨달았다. 자신 앞의 작은 존재와 마주하는 친구의 태도에서 그의 인격이 엿보였다.


문득 어린 시절 일기에 '어른이 감당할 어려움이 있듯이, 내 고민은 내 나이에 충분히 감당하기 어려운 일'이라고, 그래서 '아이의 고민이 가볍다 생각해선 안된다'라고 썼던 기억이 났다. 네가 무슨 고민이 있냐는 말에 욱해서 쓴 거지만, 그 구절을 나중에도 여러 번 생각했다. 작은 인간이라고 삶까지 작은 걸까, 하고. 하지만 내 친구 같은 어른 앞이라면 작은 인간의 삶도 같은 크기일 거다.

작은 인간을 생각하면 영화 <개 같은 내 인생>의 잉마르가 떠오른다. 불안할 때마다 자기보다 더 고독한 우주 개 라이카를 걱정하는 12살 잉마르는, 작은 어깨보다 큰 생의 무게를 짊어지고 때때로 폭주하는데, 어른들은 속도 모르고 '작은 악마'라며 화를 낸다. 하지만 어리다고 감각과 정보를 적게 받아들이진 않는다. 오히려 더 예민하지만 어른의 상식과 다른 판단을 내릴 뿐이다. 완결된 질서를 가진 하나의 우주가, 작은 인간 안에도 있다.

빠르게, 효율적으로, 이런 단어들로 이미 너무 많은 희생을 밟고 지나왔다. 튀어나온 자갈을 무시한 채 편하게 가려고 매끈한 아스팔트로 덮어 버렸다. 모두가 공통으로 겪는 이 재난 속에서, 들려오는 아픈 소식 사이에서 하나하나의 삶을 다시 돌아본다. 작은 인간의 삶은 어른이 돼서야 같은 가치를 지니는지, 생산성 없는 몸은 동등하지 않은지, 재난 앞에서 목숨의 층위를 가를 수 있는지, 작은 것은 쉽게 희생해도 마땅한지.

식물은 물을 아무리 줘도 햇빛이 모자라면 키만 비죽 커버린다. 물, 햇빛, 영양이 고루 갖춰졌을 때 옆으로 위로 풍성하게 큰다. 당장의 화려한 변화는 쉬워도 뭔가 모자란 건 후에 꼭 표시가 난다. 평온과 쾌적은 특별함이 아니라 구석까지 닿는 배려에서 온다. 보이지 않는 고통과 불안이 존재한다면 쾌적할 수 없다. 비록 작은 인간의 시절은 지났더라도, 우리도 코너에 몰리거나 시스템 밖으로 밀려날 수 있다. 늘 경쟁하며 애쓰는 건, 무의식 중에 알고 있기 때문이다.

오디 도서관이 부러웠던 건 한 사회가 변화해온 두터운 나이테가 엿보였기 때문이다. 물론 고른 변화는 너무도 더뎌 조바심이 난다. 심지어 나 한 사람조차 가만히 있어선 안된다. 하나의 사건에 분노하는 것만으론 바뀌지 않는다. 내 일상에서 사소한 전투를 매일 치러야 한다. 언어를 가졌다면 가지지 못한 이들 대신 목소리를 내야 한다. 그들 목소리의 자리가 생길 때까지, 스스로 말하기 어려운 작은 인간들이라면 더더욱.


천천히 함께 가지 않으면 진짜 변화는 오지 않는다. 고루 변화하여 구석구석의 작은 존재들까지 안전할 때 비로소 이곳에서 안전하다고 여길 수 있을 테다. 나와 당신이 누구여도, 우리가 언제 어떤 상태일지라도.

작가의 이전글 구체적인 얼굴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