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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ophy Mar 15. 2021

구체적인 얼굴들

우리 멀리 떨어져 있어도

지난달에 작업한 글들은 주최 측의 권고로 작가 3분과 모두 비대면 인터뷰를 진행했다. 서면 인터뷰를 꼼꼼히들 답변해주신 덕에 작업은 무사히 마무리했지만, 어쩐지 뒤끝이 아쉬웠다. 아직 제작되지 않은 작품에 대해, 작가들과 만나지 않은 채 인터뷰해서 쓴다니, 가상현실 속에서 작업하는 기분이었달까.

또 얼마 전에는 친구에게 무언가 받아야 해서 지하철역 개찰구에서 잠깐 보기로 약속을 잡았다. 누가 우리 둘의 만남을 금지한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겨울옷으로 꽁꽁 싸매고 마스크까지 낀 채 눈만 빼꼼 보이는 두 얼굴과 그 사이를 가로지르는 개찰구의 느낌은 기묘했다. 그 와중에 서로가 서로인 걸 알아채는 게 더 신기했던 아이러니까지 더하면, 그날의 기억은 마치 서로 만날 수 없는 이 재난의 시대만큼이나 낯설었다.

누군가 마스크 쓰기 전의 일상이나 여행의 기억이 마치 전생 같다고 했다. 불과 1년 사이에 익숙한 것들이 너무 멀어졌다. 몰랐던 게 아니라 너무 잘 알고 있는 익숙한 것들이라 멀어진 거리가 배로 느껴진다. 아는 맛이 더 무서운, 뭐 그런 거.


여행이란 것은 구체적 장소보다 낯선 환경에의 노출 그 자체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해왔지만, 그래도 이제는 구체적 장소들이 그립다. 여행뿐일까. 일상도 사람도 작품도, 직접 느끼는 구체적인 감각이 더욱 그리운 날들이다.

맞은편에 앉은 사람의 입꼬리가 서서히 올라가는 것을 보는 기분, 또렷하게 들리는 목소리, 오고 가는 이야기와 간간이 끼어드는 숨소리, 식기가 부딪히는 소리와 바로 옆 자리의 들리는 듯 들리지 않는 대화, 비행기에서 막 내려 공항 밖에 나섰을 때의 낯선 공기, 기차 창 밖에서 서서히 저물어가는 해, 그때의 빛깔, 옆자리에 앉은 사람과 어깨를 부대끼며 보는 영화라던지, 눈부신 날씨의 어느 날 길에서 만나는 낯설고 선명한 표정들.


그렇게 직접적이고 구체적이고 그래서 매번 낯설고 온 감각을 이끄는 것들. 마치 작은 점들처럼 세상에 산재하는 반짝이는 것들.

그리움을 생각할 때면 늘 김환기의 그림이 떠오른다. 커다란 화면에 푸른 점을 하나씩 찍어 완성한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1969)는 마치 커다란 하늘, 또는 우주를 연상케 한다. 처음 이 그림을 봤을 때, 화가는 저 수많은 점을 찍으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궁금했다.

"저렇게 많은 별 중에서/별 하나가 나를 내려다본다/이렇게 많은 사람 중에서/그 별 하나를 쳐다본다/밤이 깊을수록/별은 밝음 속에서 사라지고/나는 어둠 속에 사라진다/이렇게 정다운/너 하나 나 하나는/어디서 무엇이 되어/다시 만나랴."

- 김광섭 <저녁에>

이 작품의 제목이 위 시의 마지막 구절을 인용했다는 사실을 알고 나서야 그 궁금함이 해소되었다. 이것도 짐작일 수 있지만, 멀리 뉴욕에 머물던 나이 든 화가는 하늘 위의 별을 그리듯 점을 하나씩 찍으면서 고국을, 그곳에 있는 정다운 얼굴들을 하나씩 떠올리며 그리워했던 게 아닐까.


당시 그의 일기에는 "서울을 생각하며, 오만가지 생각하며 찍어가는 점", "내가 그리는 선, 하늘 끝에 더 갔을까, 내가 찍은 점, 저 총총히 빛나는 별만큼이나 했을까"라고 쓰여 있었다고 한다. 그의 붓 끝에서 그리운 것들은 하나의 별이 되었고, 그리움을 빼곡하게 모은 화폭은 푸르게 빛나는 하늘이 되었다.

어제오늘은 눈으로 사건사고가 많아서 안타까웠지만, 한편으로는 모두의 피드가 눈으로 가득 차서 좋았다. 어제저녁에는 차로 데려다준다는 걸 마다하고 잠시 걸으며 눈을 구경했다. 온몸으로 눈을 맞으면서 다른 어딘가에서 똑같이 눈을 맞고 있을 얼굴들을 생각했다. 눈 온다며 신나서 뛰어나올 누군가의 얼굴, 눈 때문에 곤란해할 얼굴, 분명 춥다며 창밖으로 고개만 살짝 내밀고 눈 구경하고 있을 또 다른 얼굴, 그리고 또, 또,

날씨란 것은 몹시 변화무쌍하지만, 그래도 근거리의 같은 하늘 아래에서는 비슷한 감각을 맛볼 수 있다. 물론 바람이나 햇빛 같은 것도 있지만, 유난히 시각적 감각을 깨우는 폭설이어서였을까. 아니면 오랜만에 공통의 감각이 절망이 아니라 새하얀 어떤 것이어서 그랬을까. 같은 감각을 느끼고 있을 사람들의 얼굴이 구체적으로 떠올랐다. 어쩌면 눈송이 하나하나가 푸른 점 같은 그리움이었을지도 모른다.




* 지난겨울 눈 오는 날에 쓴 글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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