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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ophy Mar 12. 2021

뒷모습

이제야 안아줄 수 있을 것만 같은

이달은 늦은 밤 혼자 작업하는 날이 많았다. 시간이 흐르는지도 모르고 작업하다 끝날 무렵에야 제대로 하늘의 색을 본다. 얼마 전엔 새벽녘에 작업하다 거실에 나왔는데, 어두운 베란다에 비치는 가로등 불빛을 물끄러미 보다가 오래전 어떤 날 그즈음에 서있던 아빠의 뒷모습이 생각났다.

대학교 4학년쯤일까, 나는 진로 고민으로 이른 새벽까지 잠들지 못하는 날이 많았다. 그 날은 유난히 더 잠이 안 왔다. 물을 마시려고 방문을 열고 나오다가 출근하려던 아빠와 마주쳤다. 아빠는 멀리서 근무하고 계셔서 주말을 집에서 보내고 월요일 아침 해도 뜨지 않은 시간에 집을 떠나곤 했다. 일요일 저녁에 떠날 수도 있었겠지만, 하룻밤이라도 더 가족과 시간을 보내고 싶은 마음이었을 테다. 특히나 가끔 서울에서 내려오는 딸이 있는 날은 더더욱.

출근하려던 아빠와 마주친 나는 괜히 머쓱해서 어색한 인사를 건네고 도망치듯 다시 방으로 들어갔다. 아무도 뭐라 하지 않았는데도 괜히 자신 없는 날들을 보내고 있었기 때문에, 늦게까지 안 자고 있다고 한 소리 들을 것 같아 혼자 움찔했던 걸지도 모른다. 현관문 여닫는 소리가 들리고야 마음이 편해졌던, 쓸데없이 긴장했던 밤의 기억이다.

나의 감정을 거두고, 그때 보았던 풍경을 최근에야 제대로 기억해냈다. 푸르스름한 새벽의 기운과 뒷짐 진 아빠의 뒷모습. 얼마 전 내가 창밖을 내다보았던 딱 그 위치 즈음에서 아빠는 말없이 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출근 준비는 이미 마친 채였다. 기억해낸 후에 내내 생각했다. 해도 뜨지 않은 새벽, 창밖을 바라보고 선 사람의 마음은 어떤 것이었을까.

확실친 않지만, 그로부터 한참이 지난 지금은 조금 알 것도 같다. 책임감과 두려움, 사랑과 외로움, 그런 모순되는 감정이 공존하는 틈새에서 비어져 나오는 쓸쓸함 같은 것. 혼자서 어찌할 수 없는 그런 마음을 안고 다시 밝아오는 날을 속수무책으로 바라보던 기분을 말이다.


때로는 뒷모습이나 자는 얼굴에서, 마주 앉아 똑바로 바라보는 얼굴보다 더 많은 것이 읽힐 때가 있다. 그리고 이제는 없는 사람의 그림자에서 몇 번의 실패를 딛고 다시 일어나 살아냈던 감각을 읽는다. 어쩌면 그 그림자는 내게도 존재한다. 다만 그늘이 아니라 빛으로.

처음엔 놓쳐서 아까운 순간이 떠올라 슬프다가, 한동안 좋았던 기억만 몽글몽글 솟아나 기쁘다가, 최근 몇 년 간은 아빠의 외로움이 더 눈에 띄어 애틋하다. 마치 뒷모습만 보아도 반대편에서 짓고 있을 표정이 짐작되는 것처럼, 그때는 이야기 나누지 못했던 그의 마음이 이제와 짐작이 간다. 뒷모습에서, 그림자에서, 기억의 꼬리에서 사람의 얼굴이 보인다는 것은 신기하면서도 쓸쓸한 일이다.

좋아하는 일을 하고 이것으로 행복한 순간이 많지만, 그것이 일이 되면 누구나와 같은 보편적 경험이 되므로 마냥 즐겁지만은 않다. 심지어 좋아하는 일이라 어떤 부분을 포기하지 못해 더 고생스럽게 만들거나, 다른 좋은 부분을 포기해야 하는 순간도 자주 만난다.


좋아하는 일, 꿈, 그런 것으로 쉽게 가르기에는 산다는 것이 그렇게 단순하지가 않다. 어른이 아이보다 시간을 짧게 느끼는 건 순간을 면밀하게 감각하지 않아서라고 하지만, 어쩌면 돌아볼 것이 많아서 실제로 시간이 부족한 걸지도 모르겠다.

어제 마지막 마감이 끝났다. 해가 뜨기 전 원고를 보내고 새벽의 푸른 창밖을 보면서, 작년부터 건너온 시간들이 믿기지 않는단 생각을 했다. 한편으론 앞으로의 시간이 벅차고 기대되는 동시에 두렵고 버겁다고 생각했다. 마감 몇 개를 끝내는 동안 글이 잘 풀리지 않는 막막함을 말할 데 없어 쓸쓸했고, 늦은 시간 일을 마친 기쁨을 나눌 수 없어 외롭기도 했다.


그럴 땐 사랑하는 사람들의 얼굴을 하나씩 떠올렸다. 혹은 어떤 이유에서건 이미 떠나버린 사람들을. 아무도 보지 못했겠지만 그때 내 뒷모습은 어쩌면 아빠와 닮지 않았을까, 생각했다.

과거로 돌아갈 수 있다면 언제로 가고 싶냐는 질문을 받은 적이 있다. 여러 가지 선택지가 있겠지만 만약 정말로 그런 기회가 주어진다면, 나는 열두 해 전쯤의 그 날로 돌아가서 말없이 그의 등을 안아주고 싶다. 그리고 현관에 서서 잘 다녀오라는 인사를 건네고, 문이 닫힐 때까지 뒷모습을 바라보고 싶다.


비로소 그런 날의 마음을 조금 알 것 같고, 그가 늘 가져왔던 외로움을 그 순간 조금은 덜어줄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확신이, 이제야 들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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