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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ophy Apr 20. 2021

좋은 날도 안 좋은 날도 지속하는 삶

항상 어떤 불안이 있다. 내 계획이나 의지, 노력과는 상관없이 운명이 갑자기 핸들을 틀고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상황을 끌어갈 수도 있다는 불안. 누군가는 기우라고 생각하겠지만, 실제로 그렇게 원치 않는 방향으로 인생의 핸들이 몇 번 꺾여 본 뒤에는 어쩔 수 없이 그런 최악의 경우를 상정한다. 확률은 몰라도, 내 노력이 무용한 상황이 올 수 있다는 생각과 그때를 위한 준비를 늘 마음 안쪽에 담아 둔다.

망할까 봐 벌벌 떨며 아무것도 못 하는 것과는 다르다. 최악의 상황이 와도 또 받아들이고 버틸 거라고 생각한다. 다만 일이 잘되어도 운 좋게 피해 간 최악을 떠올리며 한구석의 불안을 다독이고, 잘 풀리지 않아도 버티면 괜찮아질 미래를 품어 본다. 그렇게 보면 내 앞에 무엇이 와도 괜찮은 건 맞지만, 그래도 어떤 날은 구석에 있던 불안의 그림자가 조금 더 커지며 불면이 이어진다. 그럴 때면 김연수 작가가 <청춘의 문장들>에서 얘기한 '목'이라는 단어를 생각한다.

소도시의 상점가에서 자란 작가는 '목'이라는 단어에 민감하다 했다. '길목'이나 '대목' 같은 것. 손님이 드는 대목이 지나면 파리 날리는 시기가 찾아오고, 안 좋은 시기도 시간이 지나면 어쨌든 끝나고 다시 다른 대목이 찾아온다. 한 자리에서 오랫동안 장사하려면 그렇게 흐름이 바뀌는 걸 차분하게 지켜보아야 한다. 그리고 예상치 못한 순간을 버티기 위해 무엇이든 조금 여유를 두는 지혜가 필요하다.

그러니까 '목'이라는 건 나 하나의 힘으로 어쩔 수 없다. 지나가고 다시 오는 반복을 지켜봐야 한다. 지속하는 삶을 위해선 그 흐름을 타는 수밖에 없다. 그중 어떤 날엔 '대목'과 같은 행운이, 어떤 날엔 실수나 좌절이 있을 거다. 잘 되는 날엔 안 좋은 날을 위해 마음을 조금 아껴두고, 안 좋은 날엔 아껴둔 마음을 꺼내 조금 더 버텨보는 거다.

얼마 전 거제 여행에서, 친구와 바다를 앞에 두고 앉아 그런 얘기를 했다. 지금 우리가 나누는 이 걱정만 해결하면 끝인 것 같지만, 어차피 바로 다음 스텝을 고민해야 한다고. 인생은 싸인 코싸인 그래프처럼 오르락내리락하며 끝나지 않는 거라고.

공부할 땐 그렇게 풀리지 않다가 글을 쓰기로 마음먹자 거짓말처럼 운 좋은 기회들이 찾아왔다. 노력을 안 한 적은 없었지만 기회나 결과는 노력에 비례하지 않는다. 그래서 재작년엔 바닥을 쳤나 싶을 정도로 안 좋은 일이 많았는데도 곧 괜찮아질 거라 믿으며 그럭저럭 잘 지냈고, 작년엔 대부분의 일이 잘 풀려 기뻤지만 그렇다고 마음이 장밋빛으로 부풀진 않았다.


올라가도 내려오는 날이 있고 바닥을 치면 곧 올라갈 날이 온다는 걸, 올라가는 게 다 내 실력과 노력이 아니고 내려가는 것도 내 잘못만은 아닌 걸 안다. 물론 여전히 소소하게 일희일비하며 살지만.

영화 <소울>을 본 뒤에 생각했다. 나와 내 꿈은 먼 미래에 커다랗게 존재하는 게 아니라 오늘, 지금, 순간 속에 자잘한 조각으로 산재하고 있다고. 오늘을 참으며 목표를 향해 달려서 이룬 결과가 아니라, 매일을 감각하고 표현하는 그 모든 순간에 내가 있다고. 그러니까 커다란 인생의 목적에 삶을 매몰시키기보다 오늘을 감각하며 산재하는 나의 조각들을 찾아 점을 이으면 어느새 촘촘하고 단단한 삶이 그려져 있을 거라고.

그렇게 오늘을 사는 건 몸과 마음 곳곳에 잔근육을 키워두는 것에 가깝다. 거대한 목적이라는 큰 근육을 키워 놓아도 보조해주는 잔근육이 없다면 다치기 쉽다. 하지만 잔근육을 구석구석 만들어 두면, 원치 않는 순간에 갑자기 핸들이 꺾여도 좀 더 쉽게 버텨낼 수 있다.


오르락내리락하는 인생의 그래프 사이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건 순간을 감각하며 최선의 선택을 하는 거다. 그리고 그 선택의 순간이 모여 인생의 항로가 되지 않을까.

그래서 최근엔 목표가 없다고 말한다. 살고 싶은 방향은 있고 그쪽으로 몸을 기울이며 지속할 테지만, 진짜로 목표는 없다. 사실 이렇게 쓰는 지금도 무엇이 닥칠지 모르겠다. 당장 오늘의 일을 제대로 해냈는지 내일의 일을 잘 해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어떤 선택도 결과를 몰라 불안하긴 마찬가지다.


그저 뒤돌아봤을 때, 선택한 길을 씩씩하게, 백점은 아닐지라도 후회는 없을 만큼 꼭꼭 밟으며 걸었다고 기억하고 싶다. 그러다가 넘어지는 날엔 아무렇지 않게 털고 일어나고, 반대로 대목의 순간이 찾아온대도 놀라지 않고 담담하게, 언젠가 찾아올 다른 날을 위해 마음을 아껴 담아 두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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