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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시벨 낮은 남자가 준 에어프라이어

가출하고 에어프라이어 선물 받은 썰.

by 박수소리


( 개인정보보호를 위해, 등장인물은 '은하'라는 가명을 사용하였습니다.)


"오늘 몇 시 퇴근? 나 너 만나러 가도 돼?"

은하는 평일 오후 2시에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제 미성년자도 아니고, 대졸자에 직장인이니 가출이 아니라 출가라는 단어가 더 어울릴 나이였지만, 옷을 쑤셔 담은 농구가방을 옆에 놓고 아이스아메리카노 시켜놓고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 있는 은하의 모습은 영락없는 가출청소년이었다. 서울에서 나고 자랐지만, 막상 가출해 보니 서울에 갈만한 곳이 떠오르지 않았다. 친구들도 모두 서울 출신인 만큼 부모님과 함께 살았다. 가출한 것이니 친척 집에 가봤자 좋을 게 없었다. 찜질방에 가자니 짐이 너무 많았다. 모텔도 호텔도.. 적절한 대안이 아니었다. 이제 좀 풋풋한 단계로 들어선 남자친구에게 전화하기에는 자존심이 상했다. 그렇게 한참을 패스트푸드점에서 고민하던 은하는 갓 결혼한 친구를 떠올렸다.

그날 저녁 거대한 농구가방을 메고 친구 신혼집에 들어갔다. 13평짜리 신혼집이었지만 이곳이 아니면 오늘 더 나은 대책은 없어 보였다.

"그냥 아빠랑 좀 다퉜어."

그렇게 한마디 하고는 은하는 입을 닫았다. 맞벌이하는 신혼집에 당장 먹을 거라고는 전기밥솥에 해놓은 밥이 전부였다. 친구와 좌식상에 둘러앉아 오이에 쌈장, 김치로 대충 때우고는 인터넷으로 부동산 사이트를 뒤지기 시작했다. 친구 남편은 눈치껏 일부러 늦게 와서 목례만 끄덕하고는 옷방에 쏙 들어가 버렸다. 무뚝뚝한 친구는 말없이 새 침구를 옷방에서 꺼내왔다.


일주일 후 은하는 농구가방에 다시 옷가지를 쑤셔놓고 친구의 신혼집을 나왔다. 모아둔 돈 몇 백만 원으로 계약한 오피스텔은 보증금이 싼 만큼 월세가 비쌌다.

오피스텔 입성하던 날, 남자친구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은하 씨, 무슨 일 있어요? 우리 안 본 지 벌써 일주일이 지났어요."

거처가 확실하지 않았던 일주일간, 은하는 아무도 만나고 싶지 않았다. 집에서 가지고 나온 옷가지도 변변치 않고, 푼돈으로 부동산을 다니자니 구할 수 있는 방도 별로 없어 스스로가 너무 초라했다. 깔끔하게 도배된 오피스텔, 자신만의 공간이 생기니 이제야 조금 숨이 쉬어졌다.

"저 독립했어요."

"갑자기 왜요?"

"..."

"뭐 필요한 거 있어요?"

"없어요."

"그럼 뭐 먹고 싶은 거 있어요?"

"음... 글쎄요...... 웨지감자? 아무튼 정리되면 나중에 초대할게요."

그날 저녁 오피스텔 주차장에 불쑥 나타난 남자친구가 최신형 에어프라이어와 2킬로짜리 업소용 냉동 웨지감자 두 봉지를 건넸다.

"은하 씨. 이거 독립선물이에요. 정리되면 다시 연락 줘요."

남자친구는 아무 말도 묻지 않고 주차장을 떠났다.

웨지감자 2킬로

2주 후 은하는 에어프라이어로 웨지감자를 잔뜩 구워 파슬리가루를 뿌린 다음 오피스텔에 남자친구를 초대했다.

"그때 제가 록콘서트 가기 싫다고 했었잖아요. 농구장도 싫다고 했고... 데이트가 싫어서 피했던 건 아니에요."


은하는 소리공포증이 있었다. 대학 축제에 갔다가 사물노리패 리더가 얼쑤 하는 소리에 놀라 그 자리로 집에 간 적이 있었고, 고속버스터미널에서 목소리가 큰 버스기사를 피하느라 2시간을 더 기다려 다음 차를 탄 적도 있었다. 퇴근길 지하철에서 취객이 소리를 지르면, 지하철에서 내려 다음 지하철을 탔다.

소리에 유독 민감한 은하는 어느 날 음악도 틀지 않는 카페에 앉아있었다. 원두커피 내리는 소리가 가장 큰 소음일 정도로 작고 조용한 카페였다. 소개팅남은 단번에 은하를 알아보았다. 은하가 카페의 유일한 손님이었기 때문이다. 덩치 큰 남자가 나타나자, 은하는 반자동적으로 움츠러들었다.

"은하 씨 맞나요?"

남자의 목소리는 부드럽고, 무엇보다도 데시벨이 낮았다. 목소리가 작은 남자, 은하의 이상형이었다. 그는 은하의 남자친구가 되었다.


오피스텔은 정적이 흘렀다. 은하가 입을 뗐다.

"아버지가 술만 마시면 소리를 지르셨어요. 물건 던지고, 욕도 하시고요. 어릴 때부터 그랬어요. 예전에는 아버지 피해서 PC방에 가있곤 했는데, PC방도 요즘은 소리가 너무 커서... 아무튼 제가 그런 집에서 자란 애예요. 몇 주 전에도 제가 방에 문 잠그고 있는데, 문을 주먹으로 두드리셔서... 아버지 잠드셨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갑자기 나오게 됐어요. 아무튼 이제 아셨죠? 솔직히 말씀드렸으니까 저를 더 만날지 말지 고민해 보세요."

그는 은하가 말하는 걸 빤히 보더니, 다시 에어프라이어로 구운 웨지감자를 먹기 시작했다. 남자는 은하의 고백을 듣고도 은하를 만나겠다 말겠다 가타부타가 없었다. 그는 오피스텔을 나서며 한마디 했다.

"다음에는 국물떡볶이 좀 사 올게요. 감자만 먹으니 좀 아쉽지 않아요?"

남자가 사 온 2킬로 웨지감자 두 봉지를, 남자가 사 온 에어프라이어로 구워서 다 먹기도 전에 둘은 결혼했다. 남자와 함께 한 이후, 아버지의 고성은 들을 수 없었다. 상견례 자리에서도, 결혼식장에서도 술은 완전히 배제시켰다. 양복을 입은 아버지는 초라하고, 조용했다.



에어프라이어를 쓴 지 6년째 되던 해, 은하는 남편이 사준 에어프라이어를 중고로 팔았다. 신혼 초 튀김을 위해 자주 쓰던 에어프라이어는 태교 하면서 건강식을 챙기느라 소원해졌다. 가끔 튀긴 음식이 당기는 날이면 아이를 어린이집 보낸 사이, 동네 떡볶이집에서 3000원어치 모둠튀김을 먹는다. 아무리 에어프라이어의 성능이 좋아도, 막 기름에서 튀겨 나온 음식에 비할 바가 아니다. 웨지감자도 더 이상 굽지 않는다. 남편은 본래 감자류는 목이 멘다고 안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이번에 은하네 집에 새로 장만한 에어프라이어는 용량도 커서 고구마도, 감자도 잘 구워진다. 에어'프라이'어 명칭에 걸맞지 않게 요즘에는 거의 굽는데 쓴다.


목소리가 조용한 남편을 닮아 아이도 차분하다. 떼쓸 때도 데시벨이 높지 않게 우는 효자다. 그러다 보니 은하네 집에서 가장 시끄러운 건 에어프라이어였다. 남편은 소리에 민감한 은하를 위해 에어프라이어 아래 수건도 깔아놓고, 부엌 가장 안쪽에 배치해 주었다.

1년에 1번 가족회식 때 보는 아버지는 여전히 조용하다. 술이 없어서인지, 알아서 조심하는지 속을 알 수가 없다. 아버지 앞에서는 말이 없어지는 은하를 대신해 데시벨이 낮은 남편은 조용하게 종알종알 말도 잘한다.


조용한 은하의 세상은 매일 평화롭다. 소리공포증이 나아졌는지는 알 수 없다. 소리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지나가는 차소리가 가장 크게 들리는 조용한 동네에서, 조용한 가족과 살다보니, 가출할때 들었던 아버지의 고함소리가 환상같기도 하다.


에어프라이어는 중고마켓의 단골손님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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