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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출장에 칼림바를 챙긴 이유

칼림바로 로그아웃 한 썰

by 박수소리

"왜 거기 우두커니 멈춰 설 수밖에 없었을까요?"

마주 앉은 심리상담사는 종이에 연필로 끄적거리며 내담자에게 물었다.

"글쎄요..."

나도 몰라서 여기 온 거라고요. 거기 멈춰 서서 한 발짝도 떼지 못하고 뭐 했는지 알고 싶은 건 저라고요. 침묵이 흐르는 상담실에서 소파에 파묻힌 은정은 심리상담사를 쳐다보았다. 오후 3시 40분이었다. 10시부터 내담자를 받았다면, 은정은 벌써 5번째 내담자일 터였다. 상담사선생님은 좀 지쳐보았다. 이곳에 좋은 일이 있어서 방문하는 내담자는 없을 것이다. 온종일 틀어박혀 내담자들의 기운 빠지는 내용만 듣고 있을 테니 상담사 선생님도 얼마나 힘드실까. 아참, 나는 내담자지. 선생님이 지루하실까 봐 걱정을 할 때가 아닌데...




"베이징행 OZ331의 파이널 보딩콜입니다. 아직 탑승하지 못한 승객 여러분께서는 지금 바로 게이트 삼 번으로 와주시기 바랍니다."

정장 차림의 은정은 캐리어를 한 손으로 잡고는 무빙워크 끝지점에 우두커니 서있었다. 파이널 보딩콜을 듣자 은정이 드디어 잠에서 깨어난 것처럼 부리나케 게이트로 뛰기 시작했다.

"늦었네? 무슨 일 있었어?"

"아. 네. 아니요. 내려서 뵙겠습니다."

비즈니스에 앉은 임원을 빠르게 지나친 은정은 이코노미좌석에 앉아 안전벨트를 했다. 자칫 비행기를 놓쳤다면 벌어졌을 수많은 일련의 일들을 생각하니 식은땀이 났다. 비행기를 놓치고, 회사에 전화를 하고, 다음 비행기를 예매하고, 경위서를 올리고, 중국법인에 연락해서 미팅을 미루고, 임원을 픽업할 중국법인 직원에게 사정을 이야기하고... 출장품의를 다시 올리고...

분명 은정은 그날 비행기 출발 3시간 전에 공항에 도착했었다. 평일 낮이라 출국하는 사람도 별로 없어 체크인할 때도, 짐검사 할 때도 줄 서는 법이 없었다. 식당에서 식사를 한 것도 아니었다. 면세점 구경도 하지 않았고, 바로 무빙워크를 타고 게이트로 이동하고 있었는데... 그 후로 파이널콜을 들을 때까지의 기억이 실종되었다. 이게 가능한 일인가?

그것은 분명 SF영화의 타임슬랩이 아니었고, 초현실적인 일도 아니었고, 잠자다 가위눌린 것도 아니었다. 은정은 서서히 1달 전 있었던 일이 신비롭게 넘겨야 할 것이 아니라는 걸 인지하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그것은 은정의 문제였다.


"그런 일이 있기 전 다른 징후가 있었나요?"

"이번처럼 몇 시간 동안이나 기억이 끊긴 건 처음이었어요. 비행기 타러 가는 길에 종종 멈춰 서서 몇 초간 서있다가 다시 걸음을 뗀 적은 있었어요. 음... 또 보딩타임이 될 때까지 화장실 변기뚜껑에 앉아 있은 적도 있긴 있었어요. 그래도 그때는 다 기억이 나거든요."

1시간 상담시간은 후딱 지나갔다. 상담이 본래 그런 것인가. "잠이 잘 오지 않았어요." 하면 "왜 잠이 안 온 걸까요?" 묻고, "기억이 없었어요." 하면 "왜 기억이 없었던 걸까요?"라고 되물었다. 어쩌면 국어수업 같기도 했다. 내담자의 모든 평서문을 의문문으로 바꾸시오.

다행히 마지막 질문은 상담사가 스스로 만들어낸 것이었다.

"다음 상담시간은 언제로 하실래요?"


회사 복지로 제공되는 심리상담은 연 8회였다. 생애 최초의 심리상담, 면접도 아닌데 1시간 동안 탈탈 털린 느낌이었다. 1주 후면 또 출장을 가야 했고, 한 달 후 또다시 문답을 되풀이할 수는 없었다. 사실 은정은 답을 알고 있었다. 출장만 안 가면 이 모든 것이 해결될 것이라는 걸...


출장은 구직자 시절 은정이 동경한 바로 그것이었다. 북경 공항에 도착하면 양복을 입은 기사가 은정의 영문이름이 인쇄된 종이를 들고 기다리고, 기사를 따라 최고급 검은 세단을 타고, 음악이 흐르는 5성급 호텔 데스크에서 여권을 내밀면 미리 예약된 카드키를 당연한 듯 받고, 법인에 도착하면 직원의 안내에 따라 공장투어를 한 후 법인장과 인사를 나누었다. 또 저녁에는 본사에서 출장온 사람들을 위한 만찬이 마련되어 있었다.

이 아름답고 고급진 출장에서 은정이 느낀 건 단 하나였다. 모든 것은 대가가 있다는 것이다. 본사에서 출장팀에게 준 미션은 가혹했고, 미션이 가혹한 만큼 높은 직위의 임원이 따라붙었다. 은정의 그룹사는 M&A로 성장해 온 회사였다. 현지 회사들은 한국의 대기업에 인수되면서 한국식으로 재탄생해야 했다. 그 과정에서 자연스러운 것은 단 하나도 없었다.


매뉴얼에 맞게 차근차근 미션을 수행만 하면 되는 것이었다. 저기 공장에서 일하는 수많은 생산직들은 하루종일 서서 일하는데, 나는 얼마나 편한가. 그저 현지에 도착해서 지정된 사무실에서 하루종일 에어컨 쐬고 앉아, 순차적으로 들어오는 현지직원들과 이야기만 나누면 되는 것이었다. 이렇게 쉬운 일이 어디 있나. 출장 가는 비행기에서 수없이 반복해 보는 최면이지만, 은정은 알고 있었다. 현지직원들이 온몸으로 은정을 거부하고 경계하고 있다는 걸...

곤란한 만큼 미소 지으려 애썼고, 상대방이 경계하고 있는 걸 애써 모른척하고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고, 회식자리에서는 중국문화에 맞게 미리 준비한 화합의 유머도 던졌다. 그렇게 하루가 끝나면 구두만 벗어던지고 그대로 5성급 호텔방 새하얀 침대에 뻗었다. 새벽 2시, 뒤척이며 눈을 뜨면 텔레비전 검은 화면에 은정이 비쳤다. 정장차림에 화장도 하나 지우지 않은 채로.

입사 후 주야장천 해외출장 다니는 딸은 부모의 자랑거리였다. 깔끔한 옷을 입고, 작은 캐리어를 끌고, 공항리무진을 올라탈 때마다 은정의 아버지는 장하다고 칭찬했다. 회사에서도 은정은 질투와 선망의 대상이었다. 입사 후 줄곧 임원들을 대동하고 출장을 다녔고, 은정과 출장을 다녀온 임원들은 복도에서 은정을 마주칠 때면 매우 반가워했다. 출장 한번 다녀오지 않은 동기들은 은정을 부러워했다. 면세점에 좋은 술 있음 좀 사 와. 같이 먹자. 와. 인수법인 소식 회사포털에서만 봤는데 실제로 가보니 어때. A상무님이 너 일 잘한다고 하더라. 오 은정 대단한데...

모두 은정을 부러워했다. 그런데 정작 당사자인 은정은 출장 갈 때마다 불구덩이에 끌려가는 느낌이었다. 다들 부러워하는데 나는 왜 이럴까. 은정은 자신의 감정이 틀렸다고 생각했다. 은정은 당당해야 했고, 즐거워야 했고, 세련되어야 했다.


다음 출장을 앞두고 은정은 서점에 들렀다. 어떤 상황에서건 잠의 나락으로 떨어지게 할 가장 지루한 책을 구해야 했다. 지난번 출장 때, 직원 간담회를 앞둔 밤, 1시간에 한 번씩 깨기를 반복했다. 잠만은 잘 자야 장기 출장에서 버틸 수 있었다.

대형서점 초입 잡화코너에 가습기 옆 어린이들이 우르르 몰려있었다. 도옹, 도옹, 도옹, 칼림바 소리였다. 어린이들은 저마다 두세 번 손가락으로 칼림바 금속을 튕겨보다가 이내 흥미가 떨어진 듯 이동했다. 도옹, 도옹, 도옹, 오르골 하고도 비슷한 소리, 어린이들도 한두 번 해보면 지루해지는 그 소리... 어쩌면 칼림바가 불면의 지옥에서 나를 건질지도 몰라. 그렇게 은정은 칼림바를 구입해 출장길에 올랐다.


호텔방에서 잠자리에 들기 전 은정은 캐리어에서 칼림바 파우치를 꺼냈다. 단단한 나무 위에 금속막대들이 턱시도처럼 균일하게 박혀있었다. 도, 레, 미, 파, 솔, 라, 시, 도.. 동동동동동동동동... 엄지로 통통 금속막대를 튕기자 동그랗고 달콤한 소리가 났다. 17 음계 칼림바는 생김새가 단순한 만큼, 주법도 단순했다. 10분만 가지고 놀았을 뿐인데, 어릴 때 즐겨 부르던 대부분의 동요를 더듬거릴 수 있었다. 또 무슨 노래를 칠 수 있을까. 핸드폰으로 칼림바 악보를 찾아 한 곡씩 쳐보니 30분이 후딱 갔다. 내일은 무슨 곡을 쳐볼까. 내일은 아르페지오를 연습해 보는 거야. 칼림바를 만지던 은정은 문득 처음으로 출장 중 로그오프에 성공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은정의 출장은 긴장의 연속이었다. 언제나 출장팀 막내였던 은정은 호텔 조식을 먹으며 출장팀 출근 배차가 잘 되어 있는지 확인해야 했고, 퇴근 후에는 가야 할 현지 맛집을 섭외했다. 호텔방에 들어간 후에는 본사에서 온 이메일과 메신저를 확인해 일일이 답해줬다. 주말이 끼면 상사들의 의견을 물어 주변 관광지를 알아보고 현지 여행사를 계약해야했다. 밤잠도 제대로 오지 않았다. 침대에 누웠다가도 벌떡 일어나 포스트잇에 내일 할 일을 적어놓고 노트북에 붙여야 안심이 되었다. 출근과 퇴근의 경계가 없었고, 장기 출장 때는 주말과 평일의 경계도 허물어졌다. 어쩌면 업데이트를 미룬 채 장기간 가동 중인 컴퓨터와도 같았다. 그런 은정을 칼림바는 동동동 거리며 로그아웃으로 이끌었다. 그날 밤 은정은 오랜만에 단잠을 잘 수 있었다.






은정을 단잠으로 이끌었던 칼림바는 이제 책장 한 켠으로 콕 들어갔다. 경기가 침체되면서 그룹사가 더 이상 중국에서 새로운 M&A를 추진하지 않게 되면서, 은정은 출장을 가지 않아도 되는 부서로 이동할 수 있었다. 항공사로부터 마일리지 등급 하향조정 메일을 받은 은정은 가끔 리무진을 밥먹듯이 타던 때를 생각해 본다. 5성급 호텔의 새하얀 침대보도, 비행기 마일리지도, 검은 세단도 모두 화려했지만, 정작 행복과는 비례하지 않았다. 확실히 여행은 내 돈 주고 허름한 숙소에서 묵는 게 제일 속 편하고 즐거웠다. 가끔 스트레스로 잠이 오지 않을 때는 칼림바와 흡사한 오르골연주를 검색해서 틀고 잔다. 동동동 거리는 소리를 들으면 언제고 은정은 습관처럼 로그아웃에 성공한다.


칼림바는 중고마켓의 단골거래품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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