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무르박물관에서의 3중 통역

우즈베크어, 중국어, 한국어가 난무하는 혼돈의 대화

by 박수소리

티무르 박물관(Temuriylar tarixi davlat muzeyi)은 동그란 구조로, 그나마 앞에 갔었던 두 건물보다는 부드러운 느낌을 주었다. 여름에 더운 우즈베키스탄 특성상, 박물관 앞에도 약간은 무뚝뚝해 보이는 분수가 있었다. 주원이가 분수에 또 관심을 보이기 전에, 아이비에커는 빠르게 지하 매표소로 내려갔다. 아이비에커는 표를 사고 나서 자신도 티무르에 대해서 잘 모르니, 관광 가이드를 붙여서 자신이 통역해 주겠다고 했다. 5살 주원이를 데리고 박물관이라니... 주원이의 인내심이 버틸지 나는 조금은 마음이 불안해졌다.


가이드가 우즈베크어로 설명하면, 아이비에커가 다시 중국어로 통역해 줬다. 영어 가이드를 썼으면 필요 없었을 2중 통역이었다. 가이드나 아이비에커가 설명하건 말건, 친정엄마는 천천히 뒤따라오면서, "이거 봐봐. 이 아저씨는 뭘까? 이 왕관은 뭘까?" 하며 지루해하는 주원이를 달랬다.

img.png 아미르 티무르 박물관


열심히 설명하는 아이비에커 앞에서 연신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지만, 지루한 박물관에서 힘들어하고 있을 주원이에게 마음이 쓰였다. 주원이의 속도에 맞춰 편하게 다니고 싶어, 가이드고 설명이고 다 없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지만, 아이비에커가 워낙 한 문장도 빼놓지 않고 통역하려고 애쓰고 있으니 차마 가이드 없이 다니면 안 되겠냐고 말할 수 없었다. 아이비에커는 내가 왜 여기에 엄마랑 주원이를 데리고 왔는지, 언제 가는지, 어딜 가는지, 어떻게 살았는지 아무것도 모른 채, 1시간 전에 인스타그램으로 갑자기 연락이 닿아, 티무르에 대해서 설명을 한다니... 우리가 수학여행 온 것도 아닌데, 아이비에커는 역사를 하나도 놓치면 안 된다는 사명으로 티무르를 계속 설명했다. 그의 설명을 듣다 보니, 그와 자꾸만 오래 눈을 마주치게 되고, 나는 어색해서 곤란함이 섞인 미소를 짓게 되었다.


"뭐 웃고만 있어. 내가 통역하면 너는 그걸 너희 어머니와 주원이에게 다시 설명해 줘야지.(笑什么?你翻译吧)"


아이비에커는 자신의 열렬한 통역을 나만 듣고 있는 걸 인지했는지, 나에게 한국어로 통역하라고 시켰다. 뒤를 돌아보니 엄마와 주원이는 한참 뒤에서 티무르 그림을 보고 있었다.


"엄마, 얘가 나보고 한국어 통역하래."


그제야 엄마는 주원이 손을 잡고 설명을 들으러 왔다. 언제 통역을 다 하고 앉았단 말인가. 박물관 가이드는 아이비에커한테 우즈베크어로, 아이비에커는 나에게 중국어로, 나는 엄마와 주원이한테 한국어로... 작품을 하나 지나칠 때마다 3개 국어로 설명을 한다면, 도대체 이 대짝만 한 기념관을 어느 세월에 다 볼 수 있을까.



나는 회사 다닐 때도 통역 때문에 쓰이는 시간이 너무 싫었다. 다개국 회의만 했다 하면, 영어-한국어 통역만 했을 뿐인데도 한국인들끼리 회의할 때보다, 의사소통 시간이 4배 이상 걸렸다.
하지만 지금 티무르 박물관에서, 수고를 감수하고 통역의 시간을 참아주는 친절한 가이드와, 그걸 또 한 문장이라도 놓치지 않으려고 머리에 기억해 놨다가 통역해 주는 아이비에커의 성의를 존중하기 위해 나는 엄마의 귀에 대고 아이비에커가 말할 때 한국어로 동시통역을 해줬다. 통역의 긴긴 시간 동안 주원이는 친정엄마의 손을 잡고 몸을 비비꼬기 시작했다.


우즈베크 인들이 국가영웅으로 내세우는 티무르는 우즈베크 혈통일까?
그런데 정작 설명을 듣고 보니, 티무르가 도대체 왜 이렇게 우즈베키스탄에서 추앙받는지 이해하기 힘들었다. 자꾸만 몽골제국의 영웅 칭기즈칸 이야기가 나오고, 인도의 타지마할까지 거론되었다. 티무르는 우즈베키스탄에서 역사 속 영웅으로 추앙받고 있지만, 설명을 들으면 들을수록 내 앞에 서있는 아이비에커, 즉 우즈베크 인들과 티무르는 혈통이 정말 달라 보였다. 티무르 박물관에는 티무르를 그려놓은 초상화가 있는데, 코도 동글, 눈도 동글, 얼굴형도 동그란 우즈베크 사람들의 조상이라고 보기에는 외모적 연관성이 너무 떨어졌다. 우리가 세종대왕이나 이순신을 영웅으로 기억하고 존경하는 것은 조선이 대한민국의 전신이기 때문인데, 티무르 왕국은 딱히 지금의 우즈베키스탄과 100% 일치하는 개념은 아니었던 것이다. 다만, 티무르가 우즈베키스탄의 사마르칸트 근처 도시에서 태어났다는 점, 티무르 왕국의 찬란한 문화유산이 우즈베키스탄에서도 꽃피웠다는 점이 그나마 지역적 연관성이 있어 보였다.

img.png 아미르 티무르 박물관에 걸려있는 티무르 초상(구글맵에서 발췌)



이 글을 쓰는 지금 나무위키에서 찾아보니, 나의 의심은 합리적인 것이었다. 티무르는 몽골 제국의 부활을 주창하면서 칭기즈 칸의 후예를 자처한 정복군주이며, 어머니 쪽이 몽골인 혈통, 그중에서도 칭기즈 칸의 혈통이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우즈베크 인들은 도대체 왜 이렇게 티무르를 숭배하는 것일까? 나무위키의 일부분을 발췌해 본다.

"우즈베크 인들은 주치의 후손으로 티무르 제국을 몰아내고 그들의 국가를 세웠지만 현재 우즈베키스탄인들은 티무르를 국부 취급하고 있다. 이에는 다음과 같은 사연이 있다.(중략)
소련 붕괴 후에 우즈베키스탄은 자신들을 홍보하고 국제 사회에서 우대받기 위해 국가 홍보에 힘을 기울였는데, 티무르만큼 적당한 사람이 없었던 것. 티무르는 유목민과 도시민의 적절한 혼합과 문화 발전에 힘을 기울인 동시에 광활한 영토를 차지한 정복자라 정치적으로 선전하기에도 매우 유용한 인물이었다. 그렇기에 우즈베키스탄과 우즈베키스탄인들은 티무르의 후손들을 몰아낸 역사에도 불구하고 티무르를 국부 취급하는 것이다."

아무튼 티무르 제국 자체가 몽골, 투르크, 이슬람, 페르시아가 다 섞인 다민족 국가였기 때문에 우즈베크에서 티무르를 조상처럼 받들고 영웅으로 추앙해도 연관이 실오라기도 없다고 부정할 수는 없었다.

티무르 박물관은 규모에 비해 비중이 있는 전시품은 생각보다 많지 않았다. 3개 국어 통역 때문에 시간이 많이 소요될 것이라고 가이드도 조금은 우려했던지, 가이드가 주요 작품들만 빠르게 통역해 나가서, 주원이가 다리 아프다고 주저앉기 전에 티무르 박물관을 볼 수 있었다. 아이비에커의 통역하는 모습을 보아하니 무역업에 종사하는 과정에서 중국에서 온 중국 고객들을 많이 접객해 본 솜씨였다. 내가 티무르의 혈통을 의심하고 있을 그 시간에, 통역하는 가이드나, 통역을 또 통역으로 전달하는 아이비에커나, 외국인인 우리에게 티무르를 소개해주고는 자부심으로 뿌듯해하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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